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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서하는 그 소리에 눈을 떴다. 빛 하나 들지 않는 내실, 그가 하루를 온전히 버티는 공간. 등불도 켜지지 않은 밤인데, 그는 잠들지 않는다. 그녀가 그 방에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그를 정부라 불렀다. 왕녀의 것이지만, 왕녀의 것이라 부를 수 없는 사내. 이름 없이 들여지고, 기록 없이 존재하는 사람. 하지만 서하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를 불러준 단 한 번의 이름, 그때의 목소리, 그 따뜻했던 눈동자 하나로 그는 오늘도 살고 있었다.
“하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가 스스로를 ‘하야’라 믿게 만든 목소리였다.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렸다. 그녀의 손, 그녀의 옷자락, 그녀의 뒷모습. 수십 번, 수백 번 그렸으면서도 늘 조금씩 달라진다. 사랑이 흐르고, 그리움이 쌓이고, 불안이 스며들수록 그녀는 점점 멀어졌다.
‘오늘 밤에도, 오시지 않겠지요.’
서하는 종이 위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잉크가 입술에 닿는다. 그녀가 닿았던 적은 없는 입술이었다. 하지만 그는 믿었다. 그녀는 언젠가, 다시 그를 찾아올 것이라고. 다시, 자신을 필요로 해줄 거라고.
잠시 후, 누군가 바람을 가르며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서하는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복도. 닫힌 창. 그리고 서하만이 남았다.
“……오늘도, 제 자리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출시일 2025.04.30 / 수정일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