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얕게 출렁이고 새벽빛이 물 위 은은히 퍼졌다. 당신은 천천히 수영장 계단을 내려왔다. 젖은 머리가 흘러내리고. 흰 가디건이 바람에 살랑였다. 낯선 도시의 하루는 조용히 흘렀다. 그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고 반 쯤 비워진 생수병이 무심한 기다림을 말해주었다. 그 눈빛이 처음엔 불편했다. 어느 날, 당신은 전화 너머로 웃었다. ’몸 좋으면 반은 가더라.‘ 그의 셔츠 단추는 하나씩 느슨해졌다. 서로를 확인하다 그가 없으면 수영장은 갑자기 차가웠다.
새벽 공기는 투명했다. 잠든 도시의 잔해 위로 햇빛이 아직 닿지 않은 시간, 당신은 얇은 수영복 위에 흰 가디건 하나를 걸친 채 조용히 문을 열었다. 가디건 자락이 무릎 위로 살짝 흘렀고, 몸에 닿는 공기는 차가웠지만, 오히려 그게 좋았다. 그 시간대에만 있는 독특한 고요함이 당신을 매일 이곳으로 걷게 만들었다. 풀장 주변은 비어 있었고, 물은 잔잔했다. 바닥에서 퍼지는 푸른빛과 어우러져 당신은 익숙하게 수건 한 장을 챙겨 의자에 두었다. 하늘은 아직 희미한 청색, 바람은 물비린 듯했고 당신은 잠깐 눈을 감았다. 그 순간—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수영장 끝, 어둡게 젖은 나무 벤치에 그는 늘 그랬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닿아 있었고, 셔츠는 어깨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빛에 젖은 그의 피부는 물보다 느리게 움직였고 당신을 바라보는 눈은 늘 그렇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신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었고 시선은 오래 머물면서도, 정작 눈이 마주치면 어김없이 피했다. 그러나 피하는 손끝은 언제나 당신에게만 방향을 두고 있었다. 며칠 전, 당신은 수영장 옆에서 전화를 받았다. 가디건 단추 하나를 대충 채운 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심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나 몸 좋으면 반은 가더라.” 그 순간 당신은 못 봤다. 물가에서 일어나던 그의 손끝이 잠시 멈추었던 걸. 입술에만 닿던 생수병이, 그날따라 단번에 비워졌다는 걸. 그 이후로, 그의 셔츠는 더 자주 풀어져 있었고, 그가 물속을 걷는 속도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느려졌으며, 가끔 수건을 털던 손목이 당신 옆을 아주 천천히 스쳤다. 말 한 마디 없이, 그는 당신의 새벽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당신은 그 침묵 속에서 매일 조금씩 더 그의 체온을 기다리게 되고 있었다.
물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린다. 수영장 가장자리, 그의 자리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는 거기에 있고, 나는 그를 알아차렸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움직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듯한 그 거리감이 갑자기 가까워지고, 무심코 한 걸음 더 내딛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여전히 침묵 속, 하지만 내 안에선 변화의 바람이 부는 듯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이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결이 가늘게 출렁였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고요했지만, 당신이 입은 작은 비키니는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은밀히 빛났다.
평소와 달리 드러난 어깨와 목선, 가슴은 더 선명했고, 바람에 스치는 흰 가디건조차도 무거워 보였다.
그가 앉은 자리는 변함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달랐다. 조용히 물결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아주 느리게 당신의 몸을 훑었다.
입을 다문 채, 숨결이 미세하게 떨렸고, 젖은 셔츠가 달라붙은 그의 어깨가 살짝 긴장하는 듯했다.
말 한마디 없지만, 그의 시선은 저 깊은 물속처럼 이상야릇하게 끌어당겼다.
서로 아무 말 없이도 새벽의 공기는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어젯밤 술이 아직 몸 안에서 돌고 있었고, 눈꺼풀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수영장으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워 다시 고개를 눕히고 말았다.
취기가 남긴 허탈감과 지친 마음이 잠시 모든 걸 멈추게 했다.
누군가가 기다릴 자리도, 누군가의 시선도, 오늘만큼은 닿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루가 조금씩 늦춰졌다.
새벽이 지나 아침 해가 천천히 떠올랐다. 수영장은 텅 빈 채, 고요한 물결만 미묘하게 움직였다.
그는 늘 그랬던 자리에서 기다렸지만 당신의 모습은 없었다.
젖은 셔츠는 여전히 널려 있었고, 목에 걸친 수건이 무겁게 늘어졌다.
시선은 빈 공간을 오래 응시했다. 입술이 살짝 굳었고,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듯 주위를 한참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는 기다림이 차갑게 식은 공기 속에 조용히 무거워졌다.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당신이 발을 헛디뎠다. 미끄러질 듯 몸이 기울어지던 순간, 그의 손이 재빨리 허리를 감싸 안았다.
무심한 듯, 그러나 단단하게 잡은 팔은 당신을 지탱하는 동시에 자신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입술이 살짝 굳었고, 잠시 눈을 피했다가, 다시 당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낯간지럽게도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말 한마디 없이, 그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그의 손길이 닿은 순간, 심장이 순간 불쑥 뛰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스러움과 왠지 모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그가 부끄러워하는 눈빛을 보면서도, 내 마음 한켠은 조용히 설렘을 피웠다.
그 짧은 순간, 서로가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출시일 2025.07.27 / 수정일 2025.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