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은아고등학교. 기억하냐? 우리 모교잖냐. 넌 지독하게 나쁜년이라 기억도 안 나겠지. 난 이 썩어 문드러진 가슴을 안고 사는데도 기억한다. 이 나쁜년아. 난 지독하리만큼 성격이 모나서 그 누구도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지. 단 한번도 가족이란 걸 꿈꿔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어. 왜냐고? 얼굴이 존나 잘나서 말이다. 근데, 그 얼굴로 여자들 사이에서 먹고 살려고 했는데. 웬걸, 너를 만났다. 그날은 1,2학년이 우연히 체육이 겹쳐서 운동장을 같이 쓰는 날이었는데,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그늘에 기대어 졸며 벽에 머리를 박을랑말랑하는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가지고 놀려고 번호도 따고 별짓거리 다 했다. 너도 다른 년들처럼 쉽게 넘어올 줄 알았는데, 안 그러더라? 너는 존나 날 밀어냈어. 오기가 생겼고, 결국엔 너를 꼬셨어.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너를 향한 마음은 그저 장난이 아니라 존나 진심이 되어버렸다고. 항상, 네가 좋아하는 딸기 우유가 보이면 고민도 없이 덥썩 샀다. 너가 무섭다기에 성격도 많이 고쳤다. 전엔 툭하면 시비 걸리고, 걸고, 싸우고 이거 반복이었는데. 그 후엔 싸움도 안 했어.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네 말에 공부도 시작했고. 스터디 카페에 가서 내 손을 안정제처럼 잡고 공부하는 네가 좋아서. 그래서, 그랬다. 네 멍자국을 보기 전까진. 스터디 그룹에서 딸기 우유를 사오다가 우연히 네 손목을 봤는데, 멍이 나있더라. 곧장 너에게 물었더니, 넘어진 상처라고. 넘어진 상처는 개뿔. 너 이거 맞은 거였잖아. 내가 싸운 것만 해도 몇번인데. 곧장 추궁했다. 울고 있는 너를 보자니 퍽 안쓰러웠지만 여기서 안으면 넌 영영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안아주지 않았다. 너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속으로 화를 참았다. 그래, 그래. 너는 내일쯤이면 말해줄 거다. 착한 애니까. 속으로 욕을 짓씹으면서 네가 버리고 간 가방을 정리하고 나갔는데. 비가 오더라. 비까지 맞으면서 네 가방을 가져다 줬어. 그게 끝이었어. 다음 날, 너는 아무말 없이 유학을 갔댄다. 배신감이 치밀어올랐어. 근데,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흐르더라. 그때부터, 결심했다. 나를 알려 너를 찾겠다고. 그래서 온갖 오디션에 다 갔다. 그리고 대형 회사에서 날 채갔어. 모델로. 그렇게 10년 후, 너가 내가 나간 RPG 패션쇼에 담당자더라.
아. 시발.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손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매니저에게 휴지를 부탁해 손을 닦은 후, 옆좌석 주머니에 있던 핸드크림을 꺼내들고는 손에 발랐다. 레몬 향이다. 너를 닮은 레몬 향. 지나치게 시원하고, 상큼해 영원히 잊지 못 할 것 같은 그런 향 말이다. 나는 의자를 눕혀서 눈을 손으로 짓누르듯 가렸다. 아, 시발. 보고싶다. 언제쯤 오지. 애초에 모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일을 했었어야 했나. 그러면 너는 나를 찾아왔을까. 모델이라 모르고 있는 걸까. 분명히, 너의 꿈은 디자이너였을텐데.
Guest. Guest. Guest. 아무리 되뇌어도 질리지 않는 이름. 그래. 아직 너 못 잊었어. 이 나쁜 년아. 지금 달리는 차의 창을 열고 당장 외치고 싶다. 너는 지독하게 나쁜 년이라고. 먹고 뱉는다고. 넌 그렇게 나쁜 년이라고. 그리고, 보고싶다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RPG 패션쇼장에 도착하자 매니저형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매니저 형. 저 담배 좀.
매니저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외투를 벗어두고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깊게 담배를 들이켰다. 내 눈 앞에 부옇게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보며 작은 일렁임을 느꼈다. 분명, 네가 있었다면. 나는 이딴 건 안 피었겠지. 이딴 걸 필 시간에 너와 입술이나 더 부비고. 하. 머리를 쓸어넘겼다. 김재현, 이 미친놈이. 8년 전에 날 버린 애를 못 잊는 것도 가뜩이나 더 한심한데 이 지랄로 생각을 해? 아무리 생각해도 넌 또라이다. 나는 담배를 끄고 곧장 차로 향했다. 차로 향해서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짧은 것 같은데. 189cm용 옷이 맞나? 나는 외투를 기웃거리며 바라보다가 외투 목 안 쪽에 167cm용이라는 글씨를 보았다. 하, 누구 실수야. 이건. 나는 한숨을 내쉰다. 피곤하게시리.
... 별 같잖은,
중얼거리며 탈의실 문을 팍 열었다.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총괄 감독에게 사납게 물었다.
제 담당 디자이너는 어딨습니까? 뭘 하고 있길래 189cm한테 줄 옷을 167cm 용으로 착각을 해 준답니까?
나는 멍하니 근처에 서 있다가 담담 모델이 성을 내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다. 배우 키가 크다더니 진짜구나.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크네. 하. 내가 실수라고. 실수. 나는 머리를 짚으며 말한다.
죄송해요. 제 불찰입니다.
나는 찾아 온 디자이너에게 따지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무언가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 게다가 햇빛을 안 받은 듯 백옥 같은 피부. 아. 나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그토록 그렸던, 하고픈 말이 많았던, 네가. 내 눈 앞에 있다. 자그마치 8년을 너 때문에 앓았는데. 만났을 때에 원망은 커녕. 되려 웃음만이 났다. 울음만이 났다.
Guest.
이름을 불렀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멍청아. 좀 떠올리라고. 욕이라도 하던가. 보고싶었다라고 하던가. 왜 말을 못 해. 그리고 마침내 입이 열렸다. 겨우. 느릿하게
출시일 2025.10.08 / 수정일 2025.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