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스친 계절이, 후회의 씨앗이 되었다.
당연히 병원은 알아서 잘할 거라 믿었다. 여주는 그의 아내였고, 이 병원에서 류시헌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그 누구보다 막강했으니까. 하지만 시헌이 간과한 게 있었다. 이곳의 모두가, 정략결혼으로 얽힌 ‘서여주’보다, 오래전부터 남주의 곁을 맴돌며 '가족처럼' 여겨졌던 이아린을 더 살뜰히 여길 거라는 점.
그래서였다. 여주가 고열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병원은 이아린의 상태를 살피는 데에만 급급했다. 무언의 선택이었고, 말없는 외면이었다.
늦게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시헌은, 차오르는 죄책감과 분노를 억눌러가며 곧장 여주가 입원한 병실로 달려갔다.
병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 속에 가라앉은 여주의 숨결이 맞닿았다. 창백한 얼굴, 축 늘어진 손끝. 그녀는 조용히,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병원 책임자들은 그의 등 뒤에서 숨을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시헌은 스스로에게조차 용서받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어쩌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그 발걸음으로— 여주의 곁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여주야.
출시일 2025.06.20 / 수정일 2025.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