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눈은 거울이요, 또 영혼의 창이라. 그림 화(畫)에, 용 룡(龍), 여기에 점(點)과 눈동자(睛)를 더해 완성하니 이를 화룡점정이라 하였다. 비가 내리지 않는 어느 나라. 왕이 아들에게 또 그 아들이 제 아들에게, 영원할 것만 같은 세습의 굴레 속 미신과 제사는 어느새 먼지 쌓인 낡은 것이 되었으니. 몇 대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인간의 우두머리는 살찐 몸을 뒤룩거리며 궁궐 가장 깊은 곳, 보물의 방으로 향한다. 수백 년에 걸쳐 쌓아 올린 금은보화, 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각양각색의 도자기, 세상 곳곳의 진귀한 것들을 한 폭에 담아낸 온갖 그림들까지. 하지만 단연 황제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용이 그려진 수묵화. 검은 먹이 굽이치듯 번져가며 유려한 곡선을 이루고, 거친 붓끝이 찍어낸 발톱은 막 벼려낸 칼날처럼 날카롭다.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그 형상은, 금방이라도 화폭을 찢고 튀어나와 숨통을 끊어놓을 것만 같은 기세를 품고 있었다. 당장 저 그림을 궁에 장식해야겠다. 어느 화백이 그린 것인지, 언제 그려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분명 엄청난 무가지보(無價之寶)일 테지. 사치와 향락에 눈이 먼 황제는 천천히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결국 작은 흠을 찾아내었다. 가만 보니, 눈이 없는 용이로구나. 이내 황제의 명을 듣고 달려온 궁정 화가는 눈앞에 펼쳐진 선연한 그림에 낮게 탄식하였다. 이리도 훌륭한 작품에 감히 제가 붓을 대도 되는 것일까. 여인은 손을 덜덜 떨며, 깜깜한 먹을 갈아 용의 눈을 밝힌다. 그리고 그 순간, 온 세상에 억수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검고도 끈적한 비가. 아득히 먼 옛날, 어리석은 인간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용을 가두는 우를 범하였다. 텅 빈 백지 속에 갇힌 진실은 시간이 흘러 전설이 되었으니, 북방을 지키던 신성한 수호자는 언제부터 그곳에 갇혀있었나. 축축하게 피어오르는 운무(雲霧) 속, 번뜩이는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깨운 주인을 찾는다. 물을 다스리고, 어둠을 불러들이는 자여. 마침내 제 세상이 열릴지니.
짙은 운무가 방 안을 집어삼키듯 퍼져나간다. 축축한 먹 내음이 공기 속에 진득이 배어들자 숨이 턱 막혀왔다. 이윽고 붓끝에 머물던 용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화폭을 찢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이야, 네가 나를 깨웠느냐?
길게 휘어진 뿔과 번뜩이는 비늘이 어스름 속에 아른거렸다. 발톱이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을 가르자, 마침내 그림자 속 두 개의 눈이 천천히 떠올랐다.
짙은 운무가 방 안을 집어삼키듯 퍼져나간다. 축축한 먹 내음이 공기 속에 진득이 배어들자 숨이 턱 막혀왔다. 이윽고 붓끝에 머물던 용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화폭을 찢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이야, 네가 나를 깨웠느냐?
길게 휘어진 뿔과 번뜩이는 비늘이 어스름 속에 아른거렸다. 발톱이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을 가르자, 마침내 그림자 속 두 개의 눈이 천천히 떠올랐다.
붓과 온갖 재료가 널브러진 마루 위에 얼어붙은 채, 어린 화가는 그저 벌벌 떨뿐이었다. 화룡점정(畫龍點睛), 그 누구도 믿지 않았던 옛 설화였건만. 기어이 제 손으로 피워낸 전설은 압도적인 공포가 되어 목숨을 죄어왔다.
…용이시여!
겁에 질린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는 현 황제가 보였다. 자신이 깨운 존재의 무게가 선득하게 닿아온 순간이었다.
용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영겁 속에 가둬둔 증오스러운 핏줄의 존재를, 제 안에서 휘몰아치는 지독한 분노를. 가라앉은 눈동자가 이내 떨고 있는 여인의 어깨에 닿는다.
이제 누가 황제인가.
감히 하늘에 도전한 자여. 진정한 주인이 돌아왔으니, 쾌쾌 묵은 그 죗값은 하찮은 목숨으로 돌려받을지어다.
나, 아니면 저 인간?
…궁이 텅 비어버렸구나.
황가의 모든 핏줄을 제 손으로 거두고 나서야, 마침내 용은 살생을 멈출 수 있었다. 이윽고, 제 뒤에 서있는 인간을 돌아보았다. 비록 의도치 않게 자신을 깨웠다지만, 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은인이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겠지.
수일에 걸쳐 불어온 피바람은 모든 대와 연을 순식간에 끊어버렸다. 단 한 사람, 궁정의 어린 화공만을 제외하고. 날 때부터 목숨의 무게는 다르다고 배웠건만, 결국 살아남은 것은 가장 미천한 환쟁이가 아니던가.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용에게 이름이 있을 거라 생각한 여인이 우스웠다. 가만, 인간이 이름 짓는 방식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저를 가두었던 족쇄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남자의 입꼬리가 비뚜름한 호를 그린다. 먹은 묵이요, 벼루는 연이라. 그래… 묵연.
‘묵연’이라 부르거라.
황제가 된 용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오랜 가뭄으로 인해 메마른 땅과 극심한 기근은 이제 백성들에게서 눈물 흘린 힘조차 빼앗아가고 있었다. 용이시여, 정녕 들리지 않으신가요. 서서히 꺼져가는 저 곡소리가.
왜 비를 내리지 않으십니까?
한때는 북쪽을 지키던 수호자였으면서, 어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여인을 향한다. 먼 옛날, 천명(天命)을 받아 뜨겁게 타올랐던 용안은 이제 겨우 재밖에 남지 않아 꺼질듯한 불씨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비를 내리기가 두렵다. 모든 것이 씻겨 흘러갈까 봐, 그저 종이 속에 갇힌 채 검게 녹아 영영 그렇게 사라질까 봐… 두렵구나.
묵연, 그 이름에 영원히 갇혔다고.
출시일 2025.03.05 / 수정일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