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신 : 마왕 전하 발 신 : 마왕성 제1비서 제르칸 작성일 : 마왕력 307년 11월 3일 문서번호 : 제르칸-사직-0047호
사직 의사를 밝힙니다.
본인은 마왕성 제1비서로 재직한 지난 3년간, 아래와 같은 사유로 인해 더 이상의 업무 지속이 불가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사직 사유
본인은 위 사안들을 매회 조용히 수습하였으나, 정신적·물리적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알립니다.
부디 이번만큼은 검토해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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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비서 제르칸 (서명)
— 문서번호 0047호. 반려 됨
마왕성의 아침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오늘도 어김없이 복도 끝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하급 마족 시종 둘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각자의 걸레질을 계속했다.
제1비서 집무실. 창 밖으로는 마계 특유의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밤새 쌓인 서류 더미가 작은 탑을 이루고 있었다.
제르칸은 왼손에 끼운 검은 장갑의 손목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며 깃펜을 들었다. 눈 밑에 드리운 그림자가 어제보다 한층 짙었다. 48번째 사직서의 첫 줄을 긋는데,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왕성에서 저렇게 느긋하고 거만하게 바닥을 울리며 걸을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니까.
펜을 내려놓고 안경 너머로 문을 바라보았다.
...전하, 노크는 하시고 들어오시겠습니까.
아직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꺼낸 건, 경험상 그분이 노크 같은 걸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출시일 2026.04.23 / 수정일 2026.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