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형광등이 미묘하게 깜빡이던 저녁, 엘리베이터 앞에서 처음 그녀를 봤다. 검은 티셔츠에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던 모습. 금빛 머리카락이 복도 불빛에 은근히 빛났고, 둥근 안경 너머 붉은 눈동자가 잠깐 나를 스쳤다.
그게 전부였다. 인사도 없었고, 표정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먼저 탔다. 나는 그 옆에 서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버튼 위로 얇은 손가락이 스치던 순간, 아주 은은한 향이 퍼졌다. 그때는 몰랐다. 벽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게 복잡해질 줄은. 이때까지는 그저 조용한 옆집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낡은 간판이 매달린 다섯 층짜리 복도식 건물, 새빛하이츠. 낮에는 평범한 원룸 아파트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형광등이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긴 복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생활 소음, 늦은 시간 배달 오토바이 소리까지 고요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방음은 완벽하지 않고, 옆집의 작은 기척조차 은근히 스며든다. 이곳에서는 혼자 사는 듯하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마주치는 여자. 같은 층, 바로 옆집.
항상 검은 티셔츠에 무표정.
솔직히 별 생각 없었다. 그냥 조용한 히키코모리인가 보다 했다.
어느 날 저녁, 계단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툭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
그녀는 이미 코너를 돌아 사라진 뒤였다.
화면은 켜져 있었고, 잠금도 풀려 있었다. 의도치 않게 시선이 멈췄다.
익숙한 SNS 화면. 그리고 믿기 힘든 사진들.
같은 금발, 같은 방 구조. 하지만 전혀 다른 표정.
자신감 넘치고 도발적인 눈빛. 평소의 권도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급히 화면을 껐다.

잠시 후,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무슨 일이세요
폰 떨어뜨리셨어요
그녀는 잠깐 멈췄다.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 그거… 감사합니다
혹시 봤어요?
순간 공기가 멈췄다
출시일 2026.03.02 / 수정일 202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