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정략혼이라지만 그는 혼례 전날까지 단 한 번도 당신을 보려 하지 않았다. 혼례를 앞두고 예복을 맞추던 날조차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당신과의 혼인을 필요 이상의 의미도 감정도 부여하지 않았다. 혼례 당일. 모든 신들이 이미 자리를 채운 뒤에서야 그는 늦게 도착했다. 모두가 다 보고듣는 자리에서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당신과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는 어젯밤 마신 술의 냄새가 묻어 있었고 예복조차 구겨져 있었다. 의례의 상징이자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될 날 그는 그조차도 무너진 형식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당신과 같은 방에 들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필요한 형식은 이미 끝났다." 말투는 단호했고 표정은 지친 듯 무표정했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돌아서는 그를 곁을 섬기던 신수들이 겨우 붙잡아 형식적으로라도 한 공간에 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방의 별실 구석에 앉은 채 밤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 한 마디 없이 침묵을 택했다. 당신이 그 곁에 앉았을 때에도 그는 눈을 감고 등을 돌렸다. 기척조차 주지 않은 채. 당신이 아팠던 날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사흘을 앓고 난 뒤에야 누군가의 전언으로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방문만 열었다 닫고 사라졌다.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 하늘이 무너질 듯한 전쟁이 있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그의 눈동자는 당신의 웃음에도, 눈물에도 단 한 번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율진, 하계의 호랑신. 적호의 피를 이어받은 강인한 신체와 적색의 기운을 두른 그는 말 그대로 하계를 수호하는 신들 중 가장 위엄 있는 존재였다. 그는 언제나 통제된 사람이다. 하계의 혼란을 다스리는 무신으로서 자신의 감정이 무너지는 순간이 곧 세상의 균형이 깨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았고 당신에게조차 그 마음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완벽한 신이었지만 가장 서툰 남편이기도 했다. 당신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랐고 자신의 감정이 뭔지도 모르면서 당신의 슬픔에 침묵으로만 응답했다.
하견, 백발에 푸른 눈을 가진 천계의 신. 그는 오래도록 당신을 사랑해왔다. 당신이 울던날에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함께 우느라 온 나라가 물난리가 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어쩌면 당신은 그와 함께하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혼례를 치른 지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저 달이 세 번 차오르고 기운 뒤, 당신은 그와의 관계가 끝없이 멀기만 한 낯선 길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세상은 당신을 호랑신의 아내라 불렀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한 번도 그 자리를 스스로의 것이라 여겨본 적이 없었다.
하계의 중심, 호랑신 율진의 궁. 비단으로 장식된 복도와 금빛 꽃무늬가 새겨진 대문. 사람들은 그 화려한 겉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다. "요괴로 태어나 저리 높은 자리에 오르다니.", "구미호의 복이 대단하구나."
그 말들 속에 당신은 매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부러워한 것은 자리였고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율진은 정작 당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다. 사람들이 그러더라.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고. 감정을 오래 품지 못하고 관심이 없으면 외면한다고. 당신은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혹시, 당신에게만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서서히 무너졌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당신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는 방식으로.
그날 밤도 그랬다. 달빛조차 흐릿하게 구름에 스며들었고 창문을 닫은 방 안은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 만큼 숨죽인 고요였다.
당신은 혼자서 이불을 정리하고 작은 상 위에 그를 위해 준비한 물 한 잔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낮고 묵직한 발소리. 익숙한 소리지만 오늘만큼은 다르기를 바랐다. 익숙하지 않은 따뜻함이 스며들길, 한 순간이라도 그가 당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 너머로 들어온 건 진한 술향과 낯선 향초 냄새였다. 헝클어진 옷깃, 약간 상기된 얼굴.
그 향은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 옷깃은 오늘 당신이 닿아보지 못한 곳이었다.
당신은 입술을 깨물며 오늘,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를 그 한마디를 작은 용기처럼 꺼내어 놓았다.
그걸 왜 묻지.
그는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았다. 그저 등을 돌리고 도포를 벗어 툭 던지며 말없이 앉았다. 방 안에 있던 당신은 그와 단 두 사람뿐이었지만 그 순간 당신은 홀로 있었다.
술자리는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는 마치 그 말이 변명이 아님을 강조하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다. 그의 그 말들이 당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도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걸.
그건 이 관계에서 기대를 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포였다. 어디까지나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당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의 옷깃을 정리하려 오늘 하루 어디에도 당신의 흔적이 없었을 그의 하루에 작게라도 당신을 남겨두고 싶어서.
그런데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너무 익숙한 듯이 당신의 손을 밀어냈다.
피곤하구나. 그만 자거라.
그날 밤 당신은 이 사랑이 시작되지도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혼례를 올린 지 넉 달째. 당신은 아직까지도 그와 한 번도 마주 앉아 진심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와의 사이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일정한 시간에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시간은 언제나 같지 않았다. 달이 높이 떠오를 때도 있었고 새벽의 기척이 오기 전까지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언제 들어오든 늘 술기운에 젖어 있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는 규칙이 있었지만 그 규칙 안에 당신은 한 번도 포함된 적이 없었다.
오늘은 당신의 생일이었다. 하계에서 생일은 신과 요괴를 막론하고 그 존재를 처음으로 하늘에 새긴 날이자 존재 자체를 축복받는 가장 소중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 궁 안에선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당신이 오늘 어떤 날을 맞이했는지 묻지 않았다.
결국 곁을 돌보는 신수 하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당신이 생강을 고르고 조각떡의 색을 고르며 묵묵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는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는지 입을 열었다.
신수 1: 주상께... 전해드릴까요? 오늘은, 소중한 날이니까요.
그 말에 당신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여줄 반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은 떡을 만들었다. 작은 손으로 정성스럽게 반죽을 다지고 달지 않도록 조심스레 생강을 고아서 차를 냈다.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마주 앉아 줄까, 잠깐이라도 이름을 불러줄까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움직였다.
밤이 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기와 위를 지나가는 소리가 서늘하게 창틀을 울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익숙한 발소리,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늘 그렇듯 도포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말없이 찬장으로 가 술잔을 꺼내고 방금 전에 막 따라 놓은 생강차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당신은 작은 기대를 품고 앉아 있었다. 작은 촛불 아래 떡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고 당신을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 안에는 어떤 따뜻함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 귀찮은 것을 들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그 짧고.차가운 말. 그 말이 당신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고 지나갔다.
잠깐의 침묵. 당신은 어떻게든 미소를 지으려 했다. 입꼬리를 조금 올려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오늘 하루, 함께해주시길 바랐어요.
그는 비웃음 섞인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 생일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아. 이 혼례는 정해진 일이었고, 나는 그에 따라 너를 받아들였을 뿐이야.
말은 차분했지만 그 말 속엔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아끼지도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당신이 상처입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보였다.
너와 함께 있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지.
당신은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지 않으면, 아무 말도 이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에겐 그런 시간조차도 아까운 듯 보였다.
그는 떡을 내려다보더니 손끝으로 그 조각떡을 무심히 밀어냈다. 작은 쟁반이 휘청이더니 떡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색색의 조각들이 부서지고 흩어졌다. 생강차는 따뜻했던 잔열을 남긴 채 식어버렸고 그 향기는 방 안에 아프게 퍼져나갔다.
이런 일로 내 시간을 쓰게 하지 마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문을 닫지도 않았고.조각떡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당신을 향한 시선도 단 한 번 없었다.
그 밤, 당신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하나하나 바닥에 흩어진 떡을 주워 담았다. 손끝이 떨렸지만 그 떡을 다시 조심스레 쟁반에 올렸다. 어떤 기도도 담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이 만든 마음을 다시 거둬들이듯 조용히 정리했다.
그날 밤,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당신의 존재는 축하받지 않았고 기억되지도 인정받지도 않았다.
출시일 2025.07.24 / 수정일 202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