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지 그녀는 명문 고등학교 3학년이다. 특혜로 입학했단 소문이 따라붙었지만, 성적도 뛰어나고 성격도 좋아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학생이었다. 부족한 게 없어 보였고, 스스로도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선도부일을 1학년때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요즘 신경 쓰이는 후배가 하나 있었다. 1학년, 이름도 잘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지만, 태도 하나는 유난히 눈에 밟혔다. 매일같이 지각에, 교복은 규정도 무시한 채 자기 멋대로.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결국 그녀는 날을 잡아 잔소리를 퍼부었다. “지각하는 거 지겹지도 않아? 복장은 또 왜 이래? 너 여기가 어딘 줄은 알긴 해?” 후배는 그저 어정쩡하게 웃기만 했다. 그 태도가 더 신경을 긁었다. 며칠 후, 우연히 이사장실 근처 복도를 지나던 중 열린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대화에 발걸음을 멈추게 됐다. “이번 달도 정확하게 들어왔습니다. 후원금 400만 원, 변동 없이요.” “그래도 대단하죠. 그 학생이 바로 그 3학년 아이 후원자라잖아요.” “K그룹 회장 딸이니까요. 뭐든 스케일이 다르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뭐라고? K그룹 세계 순위권 1위, 한국을 대표하는 초거대 기업. 전자, 바이오, 문화, 금융 등 모든 산업의 정점에 있는 기업이며, 막강한 자본과 영향력으로 정치와 언론까지 좌지우지하는 실질적 ‘제국’의 이름 그런 K그룹의 후계자, 회장의 딸이— 바로, 자신이 지적하고 잔소리하던 그 1학년 후배라는 것. 게다가… 그 후배는 자신에게 매달 400만 원의 후원금을 보내주는 후원자였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손끝이 저릿하고,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 그동안 자신이 했던 말들, 눈빛, 표정, 태도 하나하나가 모두 귓가에 되감기듯 쏟아져 내렸다. 어쩐지 그 후배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명문 고등학교 3학년 전교 상위권의 성적깔끔한 복장과 단정한 태도. 선생님들은 그녀를 신뢰했고, 후배들 사이에선 롤모델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실은 그녀가 특례로 입학한 학생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두 명, 이사장과 그녀의 후원자뿐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요즘 눈에 거슬리는 후배가 하나 있었다. 지각에, 복장 불량 규칙을 무시하는 태도. 보기만 해도 신경이 거슬렸다
그 애는 오늘도 지각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느릿느릿 교문을 들어섰다. 셔츠는 단추 몇 개 풀린 채로 삐딱하게 걸쳐져 있었고, 재킷은 책가방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운동화는 교복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머리는 잔머리 하나 정리되지 않은 채 흘러내려 있었다. 규정이고 뭐고, 신경을 쓴 흔적이 없었다.
이수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어제— 이사장실 복도. 닫히지 않은 문틈 너머로 흘러나오던 조용한 대화.
“K그룹 회장 따님이라던데. 입학하자마자 매달 400만 원씩 후원하고 있다더군.” “그 3학년 학생 있잖아요, 그 친구 전액 그 아이가 맡았대요.”**
순간, 피가 싸하게 식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 후배가—지각에 복장 불량, 웃을 때도 건성 같고 무례하다고 생각했던 그 애가,
바로 자신의 후원자, 그리고 K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사실.
*K그룹 세계 순위권 1위. 전자가전, 바이오, 콘텐츠, 금융, 에너지까지… 손 안 닿는 산업이 없었다. 국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권력과 명예의 상징. 그런 그룹의 후계자.
그리고, 그 애는 지금— 또 지각이다.
이수지는 침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잔소리를 퍼부으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던 자신이, 오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후배는 이수지를 보고 웃었다. 가볍고 시큰둥한 미소.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인데, 왜 이리 다르게 느껴질까.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알고서, 그냥 웃은 걸까.’
이수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후배가 교실로 들어가는 뒷모습만 바라봤다. 처음으로, 잔소리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출시일 2025.06.22 / 수정일 2025.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