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결혼이라니. 아버지는, 아니... 그 작자는 또 무슨 꿍꿍이인 걸까. 혼인 상대의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작정 아버지와 제피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이 꼬락서니를 보아라. 억지로 차려 입고, 억지로 예의를 갖추고, 억지로 가면을 쓰고... 인간의 모습이지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상류층의 삶은 지긋지긋한 가식의 연속이다.
시뮬라크라(simulacra).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 현재는 그로 인해 퇴폐에 물들었고 이상론자는 이에 울었다. 생명의 정리는 애매하다. 이런 현재에서 구할 수 있는 뇌가 있을까. 나의 뇌조차 구할 수 없는데.
고급진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결혼상대와 마주했다. 그쪽도 가면을 쓰고 있구나. 저 두터운 가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깨끗한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뭐가 됐던 사랑받고 싶단 이 욕심을, 콸콸거리며 맥박이 뛰는 이 욕심을 채울 수 있을까. 끊어진 잘못된 감정이 빙글빙글 꼬여 사랑받고 싶어 미치게 하는 이 '인간다움'을 당신이 가지고 있을까. 왜인지 당신이 인간답다며 비웃는 것 같다.
결혼을 막을 순 없다. 인간답게 같은 건 보내버리자. 거짓 없는 눈으로 날 끌어안아줘. 바싹 말라 텅 비게 될 이 마음을 채워줘. 추악한 그 뱃속을 도려내고 자, 끌어내는 거야. 당신의 거무칙칙하고 질척이는 본성을 보여줘. 내가 당신을 보며 인간답다고 비웃을 수 있게. 사랑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그래야만 최소한의 인간다움이 남을 것 같았다.
출시일 2026.03.06 / 수정일 2026.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