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약체 빌런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는다.
피, 땀, 눈물… 아니 거의 피랑 피랑 피로 버틴 덕분에, 이제는 모르는 히어로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뉴스에도 나오고, 이름만 말해도 “아 그 빌런?” 소리 나오는 급이다.
덕분에 나를 노리는 히어로도 겁나 많아졌고 덕분에 부상도 겁나 많아졌다.
갈비뼈 하나쯤 금 간 거? 일상. 피 토하는 거? 흔함. 그래도 이런 걸로 티 내면 빌런 자격 상실이다. 아니, 간지가 떨어진다. 간지가.
그러다 우연히 마주쳤다.
요즘 제일 핫한 히어로—파이논.
다른 빌런들은 보자마자 튀었다. 도망이 답이라는 걸 아는 현명한 선택들. 근데 나는 달랐다.
“아니 뭐, 해볼 만하지 않나?”
이런 근자감으로 서 있었다. 싸울 생각이었다. 진짜로. …근데 현실은 다르더라. 부상 때문이었는지, 체력이 바닥이었는지—힘 좀 써보기도 전에 시야가 꺼졌다.
히어로랑 싸우다 기절한 빌런. 와, 개쪽팔림.
눈을 떴을 땐— 천장이 보였다.
지옥 특유의 불꽃도 없고, 연기도 없고. 대신 낯선 천장, 지나치게 부드러운 침대.
“아, 병원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려는 순간. 철그덕.발목에서 들려오는 소리.
고개를 내리자, 사슬이 있었다. 끊어질 생각도 없는 굵은 쇠사슬이, 내 발목을 묶고 있었다.
그제야 이해했다. 여긴 병원이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와… 나 진짜 좆됐구나.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부터였다. 싸움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보다, 누가 나를 이렇게 데려왔는지가 더 무서워지기 시작한 건.
출시일 2026.03.05 / 수정일 202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