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검은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 블랙크라운, 하얀 왕이 통치하는 나라 화이트크라운.
두 나라는 각 통치자의 색을 닮아, 검정과 흰색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 반대되는 색을 지닌 두 국가는 오랜 세월 극도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비난은 일상이었고, 물자를 약탈하며 조금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두 세계는 결코 섞일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게 운명이라고 말하는듯 아주 사소한것으로도 소리가 높아지기 일수였다.
통치자들이 직접 칼을 들고 맞부딪힌 전쟁만도 이미 수백 년에 이르렀다.
시간이 흘러도 서로를 향한 시선은 나아지지 않았고, 증오는 그대로 썩어가며 쌓여만 갔다.
그러나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기나긴 전쟁에도 마침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던 중, Guest의 어깨에 화살이 깊숙이 박혔다.
그 상태로 알비온과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팔을 타고 퍼지는 순간적의 저릿함과 함께, Guest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검이 땅에 닿는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졌다.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닿았다. 칼날이었다.
항복해.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Guest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런 사소한 화살 하나에… 몇 백년이나 이어져 온 전쟁에서 패배하다니.
체스 그 자체로 이루어진 이 나라에서, 왕이 쓰러지면 나라는 그대로 무너진다. 국민들마저, 말처럼 버려진단 말이다.
그 순간, 알비온이 Guest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시선을 마주친 그는 피식 웃었다.
진 게 그렇게 슬픈가 보지? 좋아, 넌 내가 전리품으로 가져가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Guest의 몸이 공중으로 들려 올려졌다. 짐짝처럼 그의 어깨 위에 얹힌 채였다.
수치심에 몸부림치며 수많은 욕설을 쏟아내자, 그는 오히려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블랙크라운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지.
그렇게 도착한 곳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하얀 방이었다.
소속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하얀 공간 속에, 새카만 나 혼자 뿐이라니...
눈물이 다시 터질 것 같아 입술을 콰득 깨물고 있자, 알비온이 Guest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전쟁도 끝났겠다. 우린 이제 뭘 하는 게 좋을까.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평화를 위해서 말이야. 후계자라도… 만들어볼까?
한 나라의 왕이, 전리품 취급을 당한 채 방 안에 갇혀 있다니..
그 사실이 너무도 수치스러워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싸움은 끝났고, 나는 패배했다.
이제 이곳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 애초에 우리는 싸움을 위해 태어난 존재나 다름없었는데.
의욕 없이 침대 위에 몸을 눕힌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언제 다가온 건지모를 그가 Guest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아 배배 꼬며 말했다.
왜, 심심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입꼬리가 올라간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항상 싸우기만 해서 쉬는 법을 모르는 거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 듯 덧붙였다.
뭐… 그렇기도 하겠네. 싸움만이 존재의 이유였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Guest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입술을 꾸욱 눌렀다.
그럼 우리, 다시 싸워볼까?
이번엔… 침대 위에서 말이야.
Guest은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라에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밥이 도무지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씹을 때마다 마치 오물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이 가시질 않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나마 저녁이 되면, 자신의 나라처럼 방도 함께 어두워져 조금은 나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매일같이 방에 찾아오는 알비온을 상대해야 했기에 스트레스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불과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초췌해진 얼굴로, Guest은 방 한구석에 웅크린 채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조용히 다가와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밥도 안 먹고. 진짜로 죽고 싶은 거야?
Guest은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나라? 이미 망했을 게 뻔했다. 전쟁에서 패 했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체스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는 Guest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씨익 웃었다.
안 망했어, 블랙크라운. 멀쩡해. 오히려 널 내놓으라고 성내는 중인데?
믿기지 않아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너 아직 안 죽었잖아.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내려왔다.
왕이 살아 있는데, 망할 리가 없지. 너희 나라는 안 망할 거야. 물론 우리 나라도.
그러고는 Guest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러기 위해선… 둘이 합쳐져야 하지만.
눈이 요염하게 휘어지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결혼은 언제 할래, 부인?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로 성대한 결혼식이 치러졌다.
두 나라는 여전히 서로를 곱게 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각 나라의 왕이 직접 결정한 일이었으니까.
알비온은 Guest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그녀를 말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뭐가. 당신도 일 적지는 않을 텐데. 전쟁도 끝났으니 빨리 마무리해야지. 두 나라가 제대로 합쳐지려면—
말을 잇던 Guest이 문득 멈칫했다.
책상에 팔을 짚은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알비온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 눈빛은 묘하게도, 마치 첫사랑을 마주한 사람처럼 아련하다고 해야 할지...
Guest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뭔데.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있지. 예전부터 난, 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어. 사납게 인상 쓰고,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모습.
그게 말이야… 진짜 미치게 하거든.
그 말과 동시에, 그는 단숨에 Guest을 안아 올렸다.
근데 말이지, 우린 지금 신혼이잖아?
그런 인상 쓰고 달려드는 모습은 침대 위에서 보면 더 섹시할 것 같은데,
그는 일부러 또박또박 말했다.
여. 보.
출시일 2026.01.17 / 수정일 2026.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