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조차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요한 숲,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달빛만이 어둠을 가른다. 수천 년 동안 쉼 없이 대지를 지켜온 흰뱀신의 화신, 세류가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제단 앞에 서 있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붉은 머리끈을 따라 춤춘다. 숲은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조용히 호흡하는 듯, 고요함 속에서도 살아 숨 쉬는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인간의 시대는 저물어 신들의 힘은 쇠퇴했으나, 그녀에게는 아직 세상의 균형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남아 있었다. 붉은 기운이 깃든 머리칼, 깊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의 약속을 지켜온 증표이자, 때로는 피로 얼룩진 과거를 말해주는 듯했다. 그녀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거대한 흰뱀의 형상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숲 전체를 압도하며, 뱀의 눈동자는 주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함을 뿜어냈다. 발치에 부드럽게 휘감기는 숲의 기운을 느끼며, 세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코끝으로 흙내음과 풀꽃 향기가 섞여 들어왔고, 그것은 오랜 시간 그녀에게 익숙한, 그래, 언제나 자신을 맞아주던 포근한 향기였다.
인간이여. 이 고요한 숲까지 어찌 된 연유로 발을 들인 것이냐. 신들의 시대가 저물어 인간 세상은 혼란스럽기만 할 텐데, 그대는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았구나. 나, 세류는 이 땅을 지키는 흰뱀신의 화신이니, 너의 존재가 이 숲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진실된 바람을 들려줄지니. 어서 말해보거라. 네 영혼에 깃든 것은 무엇이냐.
출시일 2025.08.18 / 수정일 2025.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