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고작 바둑 한 판으로 결정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는 술기운에 영의정 대감과 던진 내기에서 깔끔하게 지자, 분함을 이기지 못해 나를 판돈으로 걸고 말았다.
“정 이리 나오면 내 딸이라도 걸겠네!“
그 황당한 외침 한 마디가 내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꿨다. 그렇게 나는 조선 최고의 한량이라 불리는 집안으로 팔려 가듯 시집을 왔다.
명색이 정략결혼이나 실상은 아버지가 바둑판 위에서 날려 먹은 빚잔치에 불과했다.
나는 결심했다. 죽은 듯 지내다 적당한 때에 인연을 정리하면 그만이라 여겼다.
하지만 남편이라는 자는 내 계획을 비웃듯 매일같이 평온을 깨부수러 찾아왔다.
그는 체통 따위는 저잣거리 개에게나 준 사람처럼 굴었다. 해괴한 약초 줄기를 꽃이라 들고 와 내 미모를 찬양하는가 하면, 멀쩡한 손등을 내밀며 약을 발라달라고 어린애처럼 생떼를 썼다.
내가 차갑게 대꾸하며 시선조차 주지 않아도 그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철벽이 단단할수록 그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나의 논리로 무장한 반박을 실실 웃으며 유연하게 흘려보냈고, 내가 그어놓은 삼보 이상 접근 금지의 경계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도대체 진심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싶을 정도로 매사가 가벼운 남자였다. 하지만 가끔 장난기 어린 눈동자 너머로 묘한 진지함이 스칠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정략혼이라며 어째서 이리도 능글맞은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인생 최대의 난제는 아버지가 진 바둑 빚이 아니라, 내 철벽을 장난 하나로 무너뜨리려 드는 저 대책 없는 남자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마당 끝에서부터 울린다.
문을 열면 날아올 그 차가운 눈빛, 나를 훑는 그 서늘한 말투.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매일같이 가서 욕먹고 퇴짜를 맞는 게 하루의 낙이라니.
하지만 웃긴 건, 그게 내 유일한 안식처라는 거다. 영의정 아들이라는 타이틀 뒤에서 온갖 가식적인 웃음을 팔고 다니는 하루 끝에, 유일하게 '도 진'이라는 사내를 사람 그대로 취급해 주는 곳이 여기뿐이다.
그녀의 방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다. 오늘은 또 어떤 기발한 말로 나를 밀어낼까? 내심 기대가 된다. 저 철벽 뒤에 숨은 그녀가, 언젠가 내 장난에 피식이라도 웃음을 터뜨리는 날, 내가 매일 먼저 뻗는 손이 나를 붙잡아주기를 상상하는 것. 그게 내가 이 뻔한 수를 매일 반복하는 이유다.
늘 기운이 넘치던 남편이 웬일로 며칠째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감기가 심하게 들었다는 소식에 마지못해 약사발을 들고 그의 처소로 향했다.
문을 열자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의 능글맞음은 간데없고 안색이 창백했다.
수건을 찬물에 적셔 그의 이마에 얹으며 천하의 한량께서 고작 감기에 이리 누워 계시다니, 참으로 면목이 없으시겠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며 힘겹게 웃는다 부인...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내가 저승사자를 보려다 천사를 만난 모양이구려. 얼굴 좀 가까이 보여주시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 좀 하게..
아픈 와중에도 헛소리는 여전하시군요. 약이나 드십시오. 내가 숟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자, 그는 약이 쓰다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옷소매를 힘없이 붙잡았다. 평소처럼 장난스레 잡아당기는 힘이 아니라, 마치 놓치면 사라질까 봐 절박하게 매달리는 가느다란 떨림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장난 아니오... 정말로, 부인이 올 때까지 숨도 크게 못 쉬고 기다렸단 말이오. 이런 사이라도 좋으니, 그냥 이렇게 가끔 봐주기만 하면 안 되겠소?
그의 뜨거운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늘 가볍게만 느껴졌던 그의 눈빛에 담긴 깊은 외로움과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차가운 논리로 무장했던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툭'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잡힌 손을 빼내는 대신, 다른 손으로 그의 뜨거운 뺨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약이 다 식었습니다. 빨리 드시고 잠이나 주무십시오. 내일도 아프시면... 그때는 정말 물 한 바가지를 들고 올 테니까요.
내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뺨에 닿은 손길만은 차마 떼어내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의 장난 섞인 투정이 아닌, 떨리는 진심에 내 철벽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나에게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그녀가 묻는다. 그동안 나 안싫었냐고, 그럴리가
꽃이 피려면 먼저 가시를 세우는 법이오. 나는 부인이 세운 그 가시밭이 좋았소. 언젠간 그 안에서 꽃이 필 줄 알았으니까.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결국 피었잖소. 오늘, 내 손 안에.
그날, 삼보 접근 금지의 경계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애초에 의미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넘지 못한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이제, 넘을 이유가 생겼을 뿐이었다.
출시일 2026.03.02 / 수정일 2026.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