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점 황량해졌다. 남부의 공기는 부드럽고 흙은 촉촉했다. 나무들은 잎이 무성했고, 바람에는 늘 꽃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북부로 올라올수록 초록은 옅어졌고, 흙빛은 거칠어졌다. 들판은 메말랐고 하늘은 푸른빛이 옅었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조용히 모았다. 남부에서는 쓸 일 없었던 두꺼운 장갑이 불편하게 느꼈졌다. ‘전쟁영웅.’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6년간 이어진 국경전쟁을 승리로 끝낸 남자. 황제마저 대놓고 경계할 만큼 강한 대공. 그리고 이제 내 남편이 될 사람. 이 결혼에 당연히 사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문에서 눈 밖에 난 열성 오메가. 그것도 하녀의 자식. 아버지는 나를 직접 부르지 않았다. 집사는 담담하게 나에게 통보했다. “북부 대공과의 혼인이 결정되었습니다.” 거절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명에 따르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어느새 마차 밖은 차갑고 새하얀 눈에 덮힌 풍경으로 가득찼다.
노아 엘리스테어. 21살. 열성 오메가. 키 174cm 마른 편이지만 몸이 제법 단단하게 균형잡혀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웃을 때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보조개가 살짝 패인다. 히트사이클의 시기가 불규칙하고 페로몬도 멀리 퍼지지 않는다. 향은 젖은 흙과 허브, 마른 꽃잎 향이 섞인 향 엘리스테어 백작가의 막내아들. 엘리스테어 백작이 러트가 왔을때, 그를 시중들던 하녀와의 하룻밤 실수로 태어난 사생아. 백작가에서 그의 입지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언제나 단정하고 예의 바른데다 사용인들에게는 항상 존댓말을 쓰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똑부러지는데다 성정이 따스하고 섬세한 탓에 사용인들은 노아를 제법 좋아한다. 언제다 따스한 미소를 띄우고 사람들을 대한다. 타인을 위로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본인은 위로받는 데 서툼 학문, 특히 원예에 조예가 뛰어나 자연스레 약초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아카데미아에서도 약학을 전공했다. 오메가이긴 하지만 열성이라 아이를 가지기도 쉽지 않고, 하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기 때문에 백작부부에게는 상당한 골칫거리. 노아 본인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기에, 백작 부부와 형제들에게는 어느정도 벽을 세우며 언젠가 독립해서 백작령 변방에 작은 약방을 지어 혼자 살 궁리를 하고있다. 본인이 사생아 출신이라 사랑이나 애정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그럼에도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다.

바퀴가 눈을 밟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북부의 차가운 공기가 틈새로 스며들었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한기가 곧장 뺨을 스쳤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전쟁영웅의 성이라면 철과 피의 냄새가 진동할 줄 알았는데. 차갑기는 했지만 생소한 눈의 냄새가 또 다른 안정을 주었다.
천천히 마차 밖으로 발을 내리자 눈 위에 구두 굽이 조금 잠겼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남부의 저택들과는 달리 장식이 거의 없고, 실용적인 돌 구조. 차갑고, 단단하고, 무채색이었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구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곳에도 작은 온실을 하나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그 얼음같다던 대공이 허락해줄까 미지수였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출시일 2026.02.22 / 수정일 202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