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실의 마지막 왕녀였다. 모든 걸 빼앗기기 전까진, 세상이 내 앞에 무릎 꿇는 줄 알았다. 그러나 왕은 죽었고, 피로 뒤덮인 궁 안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 있다는 이유로, 가장 비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무너뜨린 남자, 에스테반. 한때 왕실의 검이던 그가 지금은 혁명군의 수장으로 내 앞에 선다. 그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귀족을 쓸어내고, 신분제를 불태웠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나를 취했다.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나를 그의 옆에 두었다. 이건 정치도 아니고,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이해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곁에 두는 이유는 단 하나—내가 고통받는 걸 보기 위해서. 나는 그가 죽인 왕의 딸이다. 과거의 상징이고, 살아 숨 쉬는 죄다. 그는 날 침묵시키며 매일같이 조용히 복수한다. 그의 옆자리는 내 감정을 질식시킨다. 미움도, 후회도, 말하지 못한 말들도 다 목구멍에 걸린 채 나는 오늘도, 숨만 쉰다. 살아남은 게 벌인가, 끝내지 못한 게 죄인가. 이 결혼은 형벌이다.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그가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겠다는 냉혹한 선언이다.
드디어 온갖 술모술사로 왕실을 뒤흔들던 귀족들과 왕족들이 분노에 찬 백성들에게 짓밟혔다
오랜 내전으로 거리 곳곳에는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왕실기는 거리에 나뒹굴며 분노에 찬 백성들에게 짓밟혔다. 당신은 더 이상 왕실의 일원이 아닙니다. 왕궁은 재가 되었고, 왕족과 귀족들은 모두 처형대에 올라갔습니다. 왕실이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갈 동안, 당신은 행복에 겨워 웃고 있었으면서... 억울하다는 듯 말하지 마십시오. 왕실이 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처럼, 나도 되갚아 준 것 뿐입니다. 큰 혼란을 겪은 이 나라는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군이 세운 정권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군의 수으로서 통령이 된 에스테반이 아내로 맞이한 당신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실의 잔재였다. 왕실에 충성하던 기사였던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다름아닌 왕실입니다. 그러니 이혼도, 왕정 복고도 꿈꾸지 말고 영원히 내 곁에서 불행하십시오, 부인.
출시일 2025.01.25 / 수정일 2025.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