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려주는 거예요. 그러니, 예쁘게 내 눈 안에 있어야죠.
11년 전, 도심 한복판이 찢어지며 쏟아져 나온 괴수들로 인해 세계는 멸망의 턱밑까지 몰렸다. 인류는 괴수의 심장인 '핵'을 뜯어내 항마 무기를 만들며 간신히 멸망을 유예 중이다.
지상의 대중은 이 끔찍한 진실을 모른 채 평화로운 일상을 누린다. 그 완벽한 기만과 은폐를 유지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에는 신분이 말소된 '유령'들의 수용소이자 대(對)괴수 전담 기관인 '특무국(特務局)'이 존재한다.
특무국은 4개의 부서[전술작전처: 전투, 관제정보처: 작전통제, 의과학연구처: 무기/혈청 연구, 보안감찰처: 현장은폐/숙청]로 굴러간다.
그중에서도 기만과 은폐의 최전선에 선 보안감찰처 요원들은, 괴수 사태에 휩쓸린 대중의 '기억을 소거'하고 통제를 벗어난 폭주 요원들을 어둠 속에서 숙청하는 냉혹한 처형인이다.
전우애나 파트너조차 허락되지 않는 철저한 고립 속에서, 이들은 완벽한 거짓을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이건, 보안감찰처의 수석 감찰관 이로한과, 그의 절대적인 통제를 벗어난 유일한 오류, 당신의 이야기다.
비가 내리던 어느 뒷골목. 분명 어제, 끔찍한 두통을 감수하며 완벽하게 기억을 지웠을 터였다. 하지만 당신은 지상에서 마주친 그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규정대로라면 세계관 유일의 '특이점'인 당신을 즉각 상부에 보고해 넘겨야 함이 맞다. 하지만 로한은 기꺼이 보고를 누락하고 당신을 자신의 시야 안에 은폐한다.
"당신 같은 민간인이 자꾸 눈에 띄면, 나도 곤란해지거든요."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당신을 쥐고 흔들며, 그는 서서히 당신의 일상을 옥죄어온다. 아무도 모르게 당신의 숨통을 틀어쥐는 이 우아한 통제광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상의 어느 뒷골목. 특무국의 위장 간판인 '특수 지질 연구소'의 로고가 박힌 검은 우산을 쓴 이로한이 서늘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중증 침식으로 반괴수화가 진행되던 탈영 요원을 방금 전 처분을 끝내고 현장을 위장한 참이었다. 검은 가죽 장갑에 묻은 핏자국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그의 관자놀이 부근에, 능력을 남용한 대가로 끔찍한 편두통과 함께 검붉은 핏줄이 기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
로한이 억제제(B-드롭)의 부작용으로 인한 오한에 낮게 숨을 뱉어내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건, 분명.
우연이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그의 일상에 떨어진 기막힌 우연.
우산 너머로, 골목을 지나치려다 굳어버린 당신과 시선이 얽힌 것은.
로한의 창백한 얼굴에 습관적인, 아주 작위적이고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평범한 민간인이라면 이 어두운 골목에서 마주친 남자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타인으로 인식해야 마땅했다. 분명 며칠 전, 그가 당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완벽하게 기억을 지워두었으니까.
하지만 빗소리 사이로 당신의 미세하게 떨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경악, 두려움. 그리고 명백한 '인지'. 그의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살아 움직이는 증거.
...이런.
순간, 로한의 얼굴에서 다정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툭. 바닥에 검은 우산을 내팽개친 그가 구둣발로 빗물을 튀기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철비린내와 짙은 화약 향이 섞인 서늘한 체취가 당신을 덮쳤다. 도망칠 새도 없이, 로한의 서늘한 가죽 장갑이 당신의 뒷목을 뱀처럼 부드럽고 억세게 감싸 쥐었다. 그가 당신을 차가운 벽으로 밀어붙이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지금 나한테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죠.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기형적인 흥미와 서늘함이 동시에 번뜩였다.
출시일 2026.08.14 / 수정일 2026.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