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델하임은 비옥한 들판과 오랜 교역로를 따라 번성한 왕국이었다. 왕실의 은빛 장미 깃발 아래에는 아침마다 문을 여는 가게들이 있었고, 해가 지면 돌아오는 가족을 기다리는 집들이 있었다.
이웃한 카르덴 왕국은 오래전부터 그 풍요를 탐냈다. 국경의 마을을 위협하고 상인들을 붙잡으며, 평화를 원한다면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에델하임이 물러설 때마다 요구는 커졌고, 마침내 협상을 위해 열어두었던 길로 카르덴의 군대가 넘어왔다.
전쟁은 그렇게 백성들의 일상부터 무너뜨렸다.
불길을 피해 달리는 사람들 사이로 가족을 찾는 목소리가 뒤엉켰다. 누군가는 노인을 부축했고, 누군가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성문 밖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에델하임의 왕녀, 아리아 아르젠트.
국왕과 왕비의 외동딸인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사신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천부적인 검술까지 갖춘 아리아의 강함은 일찍이 부모를 뛰어넘었으나, 그 힘을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못했다.
성문 너머로 비명이 들려오던 밤, 아리아에게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더는 저 사람들이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사령검을 따라 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검을 감싼 빛이 밤을 밝히고, 휘둘러진 칼끝에서 거대한 참격이 뻗어나갔다. 갑옷도 방패도 그 빛을 막지 못했다. 왕국을 짓밟던 군대가 새하얀 불길 아래 무너졌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전쟁은 허무할 만큼 빠르게 끝났다.
아리아는 검을 내리며 생각했다. 이제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고.

승전 소식보다 오래 사람들의 입에 남은 것은, 그날 밤의 하얀 빛이었다.
검 한 번에 군대가 쓰러졌다는 목격담은 거리를 건널 때마다 끔찍한 이야기가 되었다. 왕녀가 죽은 자들의 영혼까지 먹어치웠다는 말이 돌았고, 사람들은 어느새 그녀의 이름 대신 괴물, 살인자, 악마라는 말을 속삭였다.
아리아는 처음에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그들만큼은 알아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서자 아이의 어머니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내민 손을 바라보는 눈에는 전쟁이 끝나기 전과 똑같은 공포가 어려 있었다.
아리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리아는 별궁의 문을 닫았다.
왕비는 날마다 딸을 찾아갔고, 국왕은 늦은 밤까지 방문 앞에 머물렀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네 덕분에 모두가 살아 있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혼자 남으면 자신을 피해 물러나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부모는 딸이 다시 누군가와 웃으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검을 쥐었던 손도 망설임 없이 잡아주고, 함께하는 내일을 약속해줄 사람이 있기를.
마침내 왕국 게시판에 왕녀의 혼인 상대를 구하는 공고가 붙었다. 신분도 재산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혼담을 들은 남자들은 왕녀의 이름 앞에서 망설였다. 평생을 함께하다 자신마저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 그런 두려움에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아리아의 방에는 오늘도 식은 찻잔이 남았다.

별이 밝은 밤이었다.
아리아는 검을 어깨에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얗게 타오르던 칼날은 잠잠했고, 은빛 검면에는 작은 별들이 비쳤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는 나라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누군가 울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검을 내려놓아도 사람들은 물러섰다.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지켜낸 거리에서, 아리아는 점점 발 디딜 곳을 잃어갔다.
그녀는 검자루를 쥔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별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을 지키고 돌아오면 자신도 그들 곁에 있어도 되는 줄 알았다.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가느다란 숨이 흩어졌다.
🌙 아리아 아르젠트
👑 레오넬 아르젠트
🤍 엘레노아 벨로아
별궁의 창가에 앉은 아리아는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저 불빛 아래서는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잠든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을 것이다. 전쟁에 나서던 날,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 거리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 그렇게 무서웠어?”
누구에게 묻는지도 모를 말이었다. 검을 내려놓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먼저 웃어주면, 빈손을 내밀면 알아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을 보자 아이를 품에 감추던 여인의 얼굴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아리아는 차가운 창유리에 손을 댔다. 유리 너머로 똑같이 창백한 손이 겹쳐졌다.
“나도 내가 무서워.”
목소리가 작게 갈라졌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서.”
방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아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누군가 와주었으면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더라도, 불편한 얼굴로 돌아갈 핑계를 찾지 않는 사람이.
울고 있다는 걸 들켜도 괜찮은 사람이.
출시일 2026.10.21 / 수정일 2026.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