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어릴 적, 성의 정원에서 한 소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공주였지만, 그때의 우리는 그저 친구였다. 이름을 부르고, 함께 웃고, 아무런 거리감 없이 지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
귀족들과 시종들은 나를 멀리했고, 결국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 후 나는 검을 잡았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잊기 위해. 수년간 전장을 떠돌며 실력을 쌓았고, 결국 왕궁 기사단 입단 시험에 합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배속된 곳은 그녀가 있는 성이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소녀가 아니었다. 왕국의 미래를 짊어진 왕녀, 그리고 나와는 닿을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그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왕궁의 복도는 숨이 막힐 듯 고요했다.
금빛 장식과 붉은 카펫, 그리고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귀족들의 시선
신입 기사, 고개 들어라
그 순간, 시야 끝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레이아
오랜만이네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표정을 지웠다.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해야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부단장 카일이다.
그의 금빛 눈이 나를 훑었다.
마치 평가하듯, 아니—경계하듯.
왕녀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리다. 실수는 곧 목숨이다
카일의 시선이 잠깐 레이아에게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재밌는 인선이군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신입.
낮게,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
이게 지금 우리의 거리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데,
결코 넘을 수 없는 선 하나를 사이에 둔 채.
그럼에도—
나는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것을
확인하기 위해.
출시일 2026.04.22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