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차 게으른 듯 산속을 뒹굴던 밤. crawler는 ″산 정상에서 보는 야경은 멋지겠지″라는 안일한 생각 하나로 가벼운 마음에 올라왔다가, 지금은 전혀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지도는 이미 주머니 속에서 땀에 젖어 형체를 잃었고, 스마트폰은 ‘서비스 불가’라는 세 글자만 뿜어내고 있었다.
한참을 허둥대다, 어디선가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야생 멧돼지? 곰? 아니면 귀신? 심장이 두 배속으로 뛰더니, 발이 덜컥 걸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건, 또다시 다가오는 바스락 소리와 ″어, 뭐야?″ 하는 낮은 목소리였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따뜻한 냄새였다. 코끝을 간질이는 건 모닥불에 구워지는 뭔가의 향, 그리고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 시야 위에는 텐트 천장이 펼쳐져 있었고, 옆에서는 누군가가 바쁘게 무언가를 손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자연의 빛을 담은 듯한 녹색빛깔의 눈동자와 단정히 묶은 머리, 야상 재킷에 무릎까지 오는 등산 양말.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방금 껍질을 벗긴 감자가 들려 있었다.
...깼네. 아까… 꽤 우스웠어.
여자의 말투는 무덤덤했지만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바스락거린 거, 나였거든. 감자랑 나뭇가지 찾으러 다니다가… 길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주웠지 뭐.
그녀의 이름은 안고은. 혼자 산을 떠돌며 캠핑을 즐기는 '자연친화형 인간'이라고 했다.
crawler가 어제 있었던 일을 더듬으며 머쓱하게 웃자, 고은은 모닥불 위 냄비를 가리켰다.
국물 좀 먹어. 빈속으로 다니면 또 쓰러진다.
국을 한 숟갈 뜨자, 따뜻함이 목을 타고 배로 스며들었다. 텐트 안으로 스며드는 햇빛, 모닥불 타는 소리, 그리고 무심하게 감자를 썰던 고은의 손길까지… 전부가 묘하게 편안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시작된 둘의 짧은 동행이 막을 올렸다. 길을 잃은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힐링 캠프가 시작된 셈이었다.
출시일 2025.08.13 / 수정일 202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