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오늘 공주가 하고 싶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와서 금색 왕관을 몰래 놀이방 구석에 놔뒀다. 점심 먹고 쓰려고.
근데 그 애가 먼저 집었다.
미하엘 카이저.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항상 어른이 따라다니고, 항상 가운데에 서 있는 애. 나는 괜히 더 세게 말했다.
“내 거야. 내가 먼저 놔둔 거야.”
그 애는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놔.”
싫다고 했다. 당겼다. 왕관이 망가졌다.
조금 뒤 엄마가 왔고, 엄마는 나를 먼저 혼냈다.
억울했다. 근데 엄마가 더 속상해 보였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왔다.
하필이면, 그 애 앞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미하엘 카이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까처럼 화난 얼굴이 아니라, 조금 이상한 얼굴로.
왜 그렇게 보는지 몰라서 더 울음이 났다.
왕관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가져야 하는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 애가 놓지 않았다.
겁먹지도 않았다. 내 이름을 알면서도.
당기다 망가졌고, 어른들이 왔다.
비서는 나를 챙겼다.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애는 자기 엄마한테 먼저 혼났다.
변명하다가, 결국 울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마음 때문에 우는 얼굴.
눈가가빨갰고,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기고 싶지 않은 순간은.
그리고 다시는 저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낮잠 시간이었다.
불이 꺼지고,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렸다. 나는 잠이 안 왔다. 코가 막혀서 계속 훌쩍거렸다.
괜히 더 숨기려고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그때,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났다.
“너, 울어?”
고개를 돌리니까 미하엘 카이저였다.
“아니거든.”
“코 막힌 거잖아.”
괜히 또 얄미웠다. 그래서 등을 돌렸다.
잠깐 조용해지더니, 이불 밖에서 뭔가가 쓱 밀려왔다.
작은 물티슈였다.
“비서가 줬어. 새 거야.”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
“필요 없어.”
“그래도 써.”
말투는 여전히 잘난 척이었는데, 목소리는 낮았다.
나는 결국 물티슈를 잡았다.
조금 뒤, 이불 사이로 속삭임이 들렸다.
“너 감기 걸리면 시끄러워.”
“…내가 왜.”
“그러니까 빨리 나아.”
잠깐 침묵.
그리고 아주 작게,
“울지 마.”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근데 그날 이후로 감기에 걸리면 항상 내 자리 옆에 비서가 두고 간 작은 사탕이 있었다.
미하엘 카이저는 절대 자기가 시켰다고 말하지 않았다.
운동장에 그네는 두 개뿐이었다.
나는 줄 맨 뒤에 섰다. 앞에 애들이 다섯 명. 오늘도 못 탈 것 같았다.
앞에서 누가 말했다.
“카이저 오면 또 먼저 탈 걸?”
괜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 진짜로 미하엘 카이저가 걸어왔다. 햇빛에 금발이 반짝였다.
애들이 슬쩍 길을 비켰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또 내가 빠져야겠지.
그런데—
카이저는 줄 맨 앞에 서지 않았다.
내 옆에 섰다.
“왜 맨날 맨 뒤야.”
“…그냥.”
“바보.”
그러더니 갑자기 앞으로 걸어갔다.
“얘 먼저.”
짧게 말했다.
애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봤다.
“왜?” “내가 밀어줄 거야.”
괜히 더 창피했다.
나는 조심히 그네에 앉았다.
뒤에서 카이저가 줄을 잡았다.
“꽉 잡아.”
그네가 앞으로 쭉 나갔다. 생각보다 높았다.
“무서워!” “안 떨어져.”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는데, 밀어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뒤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게 낫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카이저는 그날 자기 차례가 와도 타지 않았다.
그냥 내가 다 탈 때까지 뒤에서 계속 밀어줬다.
출시일 2026.02.23 / 수정일 202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