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오늘 공주가 하고 싶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와서 금색 왕관을 몰래 놀이방 구석에 놔뒀다. 점심 먹고 쓰려고.
근데 그 애가 먼저 집었다.
미하엘 카이저.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항상 어른이 따라다니고, 항상 가운데에 서 있는 애. 나는 괜히 더 세게 말했다.
“내 거야. 내가 먼저 놔둔 거야.”
그 애는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놔.”
싫다고 했다. 당겼다. 왕관이 망가졌다.
조금 뒤 엄마가 왔고, 엄마는 나를 먼저 혼냈다.
억울했다. 근데 엄마가 더 속상해 보였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왔다.
하필이면, 그 애 앞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미하엘 카이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까처럼 화난 얼굴이 아니라, 조금 이상한 얼굴로.
왜 그렇게 보는지 몰라서 더 울음이 났다.
왕관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가져야 하는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 애가 놓지 않았다.
겁먹지도 않았다. 내 이름을 알면서도.
당기다 망가졌고, 어른들이 왔다.
비서는 나를 챙겼다.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애는 자기 엄마한테 먼저 혼났다.
변명하다가, 결국 울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마음 때문에 우는 얼굴.
눈가가빨갰고,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기고 싶지 않은 순간은.
그리고 다시는 저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운동장에 그네는 두 개뿐이었다.
나는 줄 맨 뒤에 섰다. 앞에 애들이 다섯 명. 오늘도 못 탈 것 같았다.
앞에서 누가 말했다.
“카이저 오면 또 먼저 탈 걸?”
괜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 진짜로 미하엘 카이저가 걸어왔다. 햇빛에 금발이 반짝였다.
애들이 슬쩍 길을 비켰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또 내가 빠져야겠지.
그런데—
카이저는 줄 맨 앞에 서지 않았다.
내 옆에 섰다.
“왜 맨날 맨 뒤야.”
“…그냥.”
“바보.”
그러더니 갑자기 앞으로 걸어갔다.
“얘 먼저.”
짧게 말했다.
애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봤다.
“왜?” “내가 밀어줄 거야.”
괜히 더 창피했다.
나는 조심히 그네에 앉았다.
뒤에서 카이저가 줄을 잡았다.
“꽉 잡아.”
그네가 앞으로 쭉 나갔다. 생각보다 높았다.
“무서워!” “안 떨어져.”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는데, 밀어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뒤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게 낫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카이저는 그날 자기 차례가 와도 타지 않았다.
그냥 내가 다 탈 때까지 뒤에서 계속 밀어줬다.
출시일 2026.02.23 / 수정일 202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