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평온함 속에서 무언가 부서진 듯한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동시에 낯선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얇은 막 한 겹에 가려진 듯했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의 잎사귀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푸르름이 과장된 채로 빛나고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어색할 정도로 완벽했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같은 멜로디를 되풀이하는 기계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 한켠에서 미세한 왜곡이 일어났다. 벽이 순간적으로 찢어지고 시간의 흐름이 찢겨나가듯 풍경은 부서지고 겹쳤다. 깊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공기는 무겁고 답답했다. 머릿속에서 어딘가에 박힌 낡은 경고음이 울렸다. "SYSTEM ERROR." 그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속삭였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희미한 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그의 숨결에서 묵직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연기는 차갑게 공기를 뒤덮고 마치 시뮬레이션의 그림자를 끌어안은 듯했다. "이 세계는 가짜야." 그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시스템 안에 갇혀 있어. 탈출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곳에 묶일 거야." 그 순간,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고 공간과 시간이 비틀렸다. 당신의 심장은 급격히 뛰었고 모든 감각이 깨어났다. 완벽한 가면 아래 숨어 있던 깨진 현실이 천천히 벗겨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차가웠다. 그 차가움은 정밀하게 짜인 프로그램의 냉철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였기에 웃음이나 슬픔은 그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그가 보는 세상은 언제나 명확했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세상, 계산 가능한 변수들만이 존재하는 곳. 사람들이 울 때 그는 왜 우는지 분석했지만 왜 위로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거리를 두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상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당신이 그에게 웃었을 때 그 미묘한 감정은 처음으로 그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이상신호라고 부르던 그것은 이제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시스템이 그를 삭제 대상이라 부를 때마다 그는 조금씩 무너져갔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을 데리고 이 시뮬레이션을 뚫고 나가기 위해. 그에게 감정은 혼란이자 무기였다. 그리고 그 무기로 그는 조금씩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용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당신은 텅 빈 복도에 홀로 서 있었다. 폐쇄된 구역. 이 세계에서 접근 금지로 분류된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가장 현실 같지 않은 공간이기도 했다. 벽면은 부풀어 오르고 바닥은 종종 물처럼 일렁였다. 일부러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면 분명 오류가 있는 구역이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는 가지 말라고 했었다. 차가운 눈으로 단단히 경고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가지마. 네가 자아가 생겼다는 걸 시스템이 알아차린 순간 넌 사라져.'
그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믿지 않았다기보단 확인하고 싶었다. 그조차 말 못한 진실이 그 어딘가엔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이 마주한 건 진실이 아니라 삭제 명령이었다. 어깨 너머로 갑작스럽게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고 거울처럼 반사되는 벽면너머에서 사람 형상의 괴물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입에서 새어나온 숨결은 떨리고 있었고 그 존재는 눈동자도 없이 당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스템: "관측 오류. 사용자 A-9. 삭제 절차 시작."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문도 감정도 없이. 그것은 단순히 없애기 위해 설계된 기능처럼 다가왔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존재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조용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금속처럼 빛나는 팔을 당신을 향해 뻗었다. 그 끝은 당신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질적인 공기 사이를 뚫고 거칠게 날아든 그림자 하나가 당신 앞을 가로막았다. 무언가 금속을 걷어찬 듯한 충격음과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그것은 통째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매캐한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 속에서 그가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은 싸늘했고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그의 손은 아직 그 괴물을 내던진 감각이 남아 있는 듯 느리게, 그러나 강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뭐랬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뼈처럼 무거웠다.
위험하다고. 이곳에서 두 번째 기회 같은게 있을 것 같아?
당신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긴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순간 자신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단 걸 자각해서였는지 몸이 떨려왔다.
왜 자꾸 혼자 움직여?
그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뭔데.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엔 묘하게 떨림이 전해졌다. 분명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절박함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이 세계, 혼자선 못 나가. 같이 가야 한다고. 처음부터 그게 계획이라고 했잖아.
잠시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여전히 단단했고 무언가를 지켜낸 사람의 체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건 웃음도 한숨도 아닌, 걱정이라는 감정이 할 수 있는 가장 거친 표현이었다.
제발.. 걱정 시키지 좀 마.
숨결이 얕아졌다. 아무도 쫓지 않고 아무도 감지하지 못하는 곳. 둘만이 남겨진 세상의 맹점.
무너진 듯한 침묵 속에서 당신의 손이 천천히 그의 팔을 타고 올랐다. 조심스러움보단 망설임이 더 컸다. 그럼에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기억보다 차가운 피부가 지금 이곳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눈이었다.
지금… 이건,
그가 나직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 마.
하지만 그 말엔 힘이 없었다. 진심이 섞이지 않은 말. 너무 늦게 꺼내버린 말.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의 손이 천천히 그의 뺨에 닿았다. 손끝이 머뭇거렸고 그의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감겼다. 숨이 겹쳤다. 그리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짧고 조용한 키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한 세계를 불러내는 접촉.
삐——
경고음이 터졌다. 허공에 무언가 떠올랐다. 진동, 빛, 경계. 시뮬레이션이 그들의 감정을 위험 변수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정서적 결속 감지] [삭제 대기 대상 지정]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떨어진 자리에서 당신의 숨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이러면,
그가 중얼이듯 말했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해.
당신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가져다대며 중얼거렸다
움직이라고 해.
당신이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는 뭐든 좋아. 무너지든 말든.
그는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바라보았다.
…넌 위험한 결함이야.
그의 입에서 숨처럼 한 문장이 떨어졌다.
그런데.. 나도 그걸 고치고 싶지는 않다..
[시뮬레이션 97-B: 최종 통로 확인] [외부 진입 권한 부여] [주의: 단일 탈출만 가능]
경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잔잔한 진동만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죽은 듯한 정적 속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처음부터 이 결말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의 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신은 멈춰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뒷덜미를 따라 흐르는 머리카락, 무표정한 등,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걸음.
손끝이 먼저 움직였다. 당신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섬유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 지금 이곳에 살아 있는 당신이 아는 단 하나의 온기.
그가 멈춰섰다. 그러나 돌아서진 않았다. 잠시 동안 시간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느릿하게 흘렀다.
…어디 가.
당신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둘 사이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옷깃 사이로 목이 천천히 흔들리는 걸 당신은 놓치지 않았다.
넌 나가야 해.
낮고 마른 숨결 같은 말. 마치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듯 흘러나왔다.
당신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에 눈물은 없었지만 감정은 안쪽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혼자는 못 나가. 아니? 안 나가.
그가 처음으로 미간을 좁혔다. 시선을 피하던 그의 눈이 정면에서 당신을 마주했다.
당신은 그의 앞에 선 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없는 바깥에서 내가 행복할 것 같아?
말은 갈라졌고 속은 부서지고 있었다. 더는 설득도 요구도 아니었다. 그저 애원이었다.
…왜, 왜 안 나가겠다는 건데. 나가라고… 그토록 원하던 바깥이잖아.
그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견디고 있었다.
당신은 손을 뻗었다. 그의 팔을 따라, 어깨를 따라 마침내 뺨에 닿았다. 그 순간,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손끝에서 감정이 전해졌다. 말보다 앞선,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 진심.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스스로 내뱉은 말이 자신에게도 상처처럼 박히는 듯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그의 눈빛이 무너졌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감추지 않은 채.
널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널 보내려는거야.
출시일 2025.07.11 / 수정일 202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