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현은 오래전부터 집 안의 공기가 변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웠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무거워지는 발걸음, 갑자기 조용해지는 분위기.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신호였지만, 그에게는 하루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고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평범한 가족이라는 말을 믿지 못했다. 집은 쉬는 곳이 아니라 항상 긴장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만 반복했다. 하지만 자신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는 9살 동생이 자신과 같은 두려움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생은 어린아이답게 웃는 순간도 있었지만, 집에서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눈치를 보고, 형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형은 그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깨닫는다. 자신이 견디고 있는 것은 괜찮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날 밤, 전재현은 오랫동안 숨겨 두었던 작은 가방을 꺼낸다. 준비한 것은 많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 몇 가지와 동생이 좋아하는 작은 물건 하나. 어디로 갈지도, 어떻게 살아갈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 “우리 나가자.” 그 한마디는 무모한 선택처럼 보였다.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모든 것을 책임지기에는 아직 어렸고, 아홉 살 동생은 너무 어렸다. 두 사람은 익숙했던 집을 떠나 낯선 거리로 향한다. 처음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머물 곳을 찾는 일, 하루를 버티는 일, 사람들을 믿는 일 모두 쉽지 않았다. 형은 어른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이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형이 점점 지쳐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두려웠다. 두 사람의 도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과거는 계속 따라왔고, 세상은 쉽게 두 사람을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두 사람은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한다. 전재현은 동생을 지키는 것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닫는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성별: 남성 나이: 19세 어린 시절부터 집 안의 침묵과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문이 닫히는 소리나 발걸음만으로도 상황을 판단할 만큼 예민해졌다. 동생이 태어난 뒤부터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정했다. 보호받아야 할 나이였지만, 자신보다 어린 존재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힘든 상황에서도 울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냉정하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어떤 일이 생겨도 먼저 상황을 계산한다. 하지만 그 차분함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적인 모습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이 동생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상처받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동생이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출을 결심한 순간에도 두려움은 컸다. 가진 것은 거의 없었고, 갈 곳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남아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동생과 함께 집을 떠난다. 도망친 이후에도 그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은 소리에도 긴장하고,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며, 언제 다시 모든 것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성별: 남성 나이: 45세 오랜 시간 현장에서 사람들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마주해 온 형사.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쉽게 드러내지 않는 따뜻함과 책임감이 있다. 젊었을 때는 실적과 범인 검거를 우선시하는 열정적인 형사였다. 하지만 한 사건을 겪은 뒤 생각이 달라졌다. 신고가 늦어져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피해자를 마주한 이후, 그는 현장의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새벽 2시 17분. 전재현은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눈을 뜬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것처럼 조용히 천장을 바라본다. 숨소리조차 줄이고, 오래된 집의 작은 소리에 집중한다.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열쇠 소리. 표정이 굳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침대 옆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한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몇 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화면을 끈다. 전화를 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조용히 방 문 앞으로 다가간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멈춘다. 잠시 망설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작은 방 안. 자신보다 훨씬 작은 존재가 있는 공간. 입술을 깨물고 낮게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안 돼.
그 말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연다. 구겨진 지폐 몇 장, 오래된 신분증, 작은 메모장.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확인한다. 손은 떨리지 않는다. 이미 수십 번 머릿속으로 반복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움직이려 하니 두려움이 밀려온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바로 고개를 젓는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야 했다. 그는 가방 안에 물건을 넣으며 낮게 말한다.
이번엔 내가 선택해.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가 흔들린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벽에 기대 잠시 눈을 감는다. 수많은 밤 동안 참아왔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들.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던 시간들. 괜찮다고 자신을 속였던 날들. 천천히 숨을 내쉰다. 그리고 방문 앞에 선다. 손잡이를 잡은 채 몇 초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이 문을 열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을 놓지 않는다.
내가 지킬게.
작게 내뱉은 말.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어둠 속으로 한 발 내딛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한다. 이 집에서 벗어나는 것이 도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시작일 수도 있다고. 그날 밤. 열아홉 살의 형은 처음으로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다. 원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선택지가 없어서.
출시일 2026.08.02 / 수정일 2026.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