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처음부터 서로를 증오했다. 공개 연회에서 서로의 자존심을 짓밟은 이후, 사교계에서는 우리 둘만 마주치면 사고가 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평생 엮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황실이 우리를 정략결혼으로 묶기 전까지는.
점점 강해지는 북부를 견제하려던 황실은 그에게는 북부를, 나에게는 몰락 직전의 가문을 볼모 삼았다. 선택권은 없었고, 결국 우린 서로를 혐오한 채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 내용은 단순했다.

가장 중요한,
절대로 아이를 만들지 않을 것.
예상대로 결혼 후에도 우린 남보다 못한 부부였다. 각방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만 부부인 척 연기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황실은 끝까지 우리를 의심했고, 북부성에 감시를 붙인 것은 물론 예고도 없이 침실까지 확인하려 들었다.
결국 들키지 않기 위해 단 한 번, 정말 단 한 번 그와 밤을 보냈다.
몇 달 뒤, 나는 몸에 이상을 느껴 몰래 의원을 불렀고, 진맥을 마친 의원은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회임하셨습니다, 대공비 전하."

북부를 지배하는 크로이츠 대공가
검과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은 그들은 수백 년 동안 국경을 지켜온 제국 최강의 무력이었다. 황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만큼 막대한 병력과 영토를 가진 가문.
그리고 남부의 명문, 에버린 공작가.
백합과 별을 상징으로 삼은 그들은 오랜 역사와 명예를 자랑했지만, 끊이지 않는 흉년과 정치적 탄압 끝에 이제는 몰락을 눈앞에 둔 귀족이 되었다.
원래라면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가문. 하나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가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장 먼저 무너질 운명이었다.
황실은 그런 두 가문을 하나의 혼인으로 묶었다. 강해지는 북부를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몰락한 남부 귀족을 황실의 손안에 두기 위해.

북부성에 밤이 내려앉자 식당을 밝히는 샹들리에의 불빛만이 길게 뻗은 식탁 위를 은은하게 비췄다. 창밖에서는 눈발이 소리 없이 흩날렸고, 넓은 식당 안에는 은식기가 맞부딪히는 작은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결혼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이 저녁 식사는 애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정해진 날짜마다 마주 앉는 보여 주기식 연기일 뿐. 식사가 끝나면 각자의 침실로 돌아가 서로의 존재조차 잊은 채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늘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식탁의 반대편에 앉은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류를 넘기며 식사를 이어갔다.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고요하게 칼을 움직이는 모습이 괜히 더 거슬렸다.
그녀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포크를 들어 올렸지만, 머릿속은 몇 시간 전 의원이 내뱉은 한마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회임하셨습니다.'
그 짧은 말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도 함께. '절대로 아이를 만들지 않을 것.'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지만 채 삼키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렸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메스꺼움을 억누르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와인잔을 집었지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향조차 오늘은 역하게 느껴졌다.
...욱

올라오는 메스꺼움에 미간이 저절로 구겨지며 작게 소리를 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면 될 줄 알았는데 몸은 생각보다 말을 듣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겨우 표정을 관리했다.
..하.
작게 숨을 내쉬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순간 식탁 위를 스치는 시선이 느껴졌다. 늘 무관심하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 얼굴을 훑어보더니,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오늘은 유난히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사람을 떠보는 데 익숙한 눈빛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향했다.
부인 답지 않게.
비아냥이 섞인 한마디였다. 그는 역시나 미묘한 변화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 한마디에 벨라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툭 내려놓았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적막한 식당 안을 짧게 울렸다. 속이 뒤틀리는 불쾌감보다도,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시선이 더 거슬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봤다. 핑크빛 눈동자에 짜증이 서렸다.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짧게 잘라 말한 그녀는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포크를 쥔 손끝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떨림을 감추려는 듯 손잡이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피곤하다. 그 대답이 귀에 걸렸다. 피곤한 것과 안색이 저렇게까지 창백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는 와인잔을 집어 들며 붉은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 시선은 잔이 아니라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음식은 거의 손도 대지 않으셨고.
한 모금. 입술에 묻은 와인을 혀끝으로 훔치며 잔을 내려놓았다. 톡, 하는 소리가 묘하게 선명했다.
부인이 좋아하는 와인인데도 손을 대지 않으시는군요.
그녀의 손끝이 순간 움찔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와인잔을 내려다봤다. 잔 속 붉은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봤다.
...오늘은 입맛이 없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내뱉었지만, 끝이 살짝 굳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한쪽만 들어 올렸다.
그것도 대공께 일일이 설명드려야 하는 일인가요?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에 그녀가 흠칫하며 문에서 손을 뗐다. 갑자기 왜 이렇게 가까운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물린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경계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그가 제 손 위에 얹은 손을 쳐냈다. 지금 제 몸이 안 좋다는 걸 들키면 분명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의 관심이 제게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부러 모진 말을 골라 말했다.
평소처럼 신경 끄고 지내죠, 우리.
출시일 2026.07.08 / 수정일 2026.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