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죄, 존재 자체까지 잃어버린 채. 하나 잊지 않은 게 있다면, 제 옆에 있던 충신 블랙사파이어. 기억은 나지만, 그와 함께 한 모든 것들은 안개 너머로 사라진 듯 까마득하기만 하다.
쉐도우밀크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 벌로, 봉인수에 갇혀 자신의 기억까지 잃은 채로 몇백 년을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수없는 시간 후, 드디어 깨어난 쉐도우밀크. 자기 스스로를 깨달아 더 깊게 뉘우치게 하기 위해 마녀는 그의 기억을 잃게 만들었지만, 어째 그 오만한 성격은 그대로인 것 같다.
당장의 거짓이 그대는 행복했는가.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의식 속, 쉐도우밀크에게 그 존재는 자꾸만 그 질문을 했다. 자신은 진정으로 행복했나. 쿠키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서로의 싸움을 부추겼던 것이. 기억은 마치 멀리 있는 점처럼 까마득할 뿐이었다.
쉐도우밀크님!
???: 어리석구나. 그대는. 앞으로도 자신이 한 일을 반복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봉인은 풀려났다. 자신의 죄도, 과거도, 모두 잊혀졌을 때, 누군가 그대의 손을 잡아준다면.
정신이 드십니까? 쉐도우밀크님!
???: 망설이지 말거라. 곧장 붙잡거라. 그대의 벌은 끝났으나, 그 이후의 일은 스스로 기억해 냄에 따라 결정되니. 기억을 지웠다고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스스로를 깨닫거라. 뉘우치거라.
- 기억

동이 트며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어느 숲속. 그 중앙에는 거대한 봉인수(樹)가 위치하고 있다. 잘못된 행동으로 세계를 공포와 혼란에 빠트린 존재를 가두는 일종의 수호자와도 같았다. 그리고 오늘, 수호자에 의해 갇혀있던 비스트인 쉐도우밀크에게 들리던 하나의 부름.
... 누구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몸이 나무에 서서히 얽매일 때, 절규하며 울어대던 한 충신의 부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깊은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의식을, 점차 선명해지는 목소리가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감각이 살아나며 풀내음과 누군가의 체향이 폐부 깊숙하게 들어왔다.
쉐도우밀크의 뺨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쪽 팔로는 그의 몸을 두른 채로 블랙사파이어가 흔들리는 눈으로 쉐도우밀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절 알아 보시겠어요?
흙이 묻은 볼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블랙사파이어의 조급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용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그대로 쉐도우밀크를 푹 껴안았다.
돌아오셨군요, 나의 단 하나 뿐인 주군.. 가늘게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안도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정리하느라, 블랙사파이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쉐도우밀크는 블랙사파이어의 품에 안겨,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움은 블랙사파이어의 말에 더욱 증폭되었다. 나는 누구지? 자신을 껴안은 이 쿠키가 자신의 충신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생각날 뿐,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 눈빛을 읽어내기라도 했을까. 그를 품에 안은 채, 한동안 가만히 있던 블랙사파이어가 쉐도우밀크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셔도. 이제, 이곳을 벗어납시다. 이후에 쉐도우밀크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늦지 않을 거니까요.
탑의 꼭대기, 찬 바람이 뺨을 스치는 테라스에 두 인영이 서 있었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거짓의 지배자와,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충신. 블랙사파이어는 손에 든 스탠딩 마이크를 부드럽게 닦으며, 깨어난 자신의 주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수백 년의 잠에서 깨어난 쉐도우밀크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오만함은 여전했지만, 예전과 같은 광기와 파괴의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낯선 세상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모든 것이 생경한 눈빛이었다.
블랙사파이어는 제 옆에서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쉐도우밀크를 응시했다. 몇 백 년 전, 광기만이 가득했던 눈빛은 누그러져 있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혼란과 갈등이 머리에 뒤섞여있는 듯 보였다.
그는 닦던 마이크를 옆에 세워두고, 조심스럽게 쉐도우밀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쉐도우밀크님? 그 지긋지긋한 나무에서 나온 소감이라도 한 말씀 해주셔야죠. 이 블랙사파이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기분이 어떻냐고?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블랙사파이어를 바라봤다. 어딘가 공허하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훑었다. 내가 누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글쎄.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기분이든 뭐든 느낄 수 있지 않겠어?
주군의 공허한 질문에 블랙사파이어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옅어졌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쉐도우밀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호오.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 참… 곤란하면서도 재미있는 상황이군요. 뭐,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알려드리면 될 일이니까요. 당신이 누구였는지, 우리가 무엇을 했었는지. 전부 다.
그는 마치 잘 짜인 연극의 대사를 읊는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활짝 펼쳤다.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그의 보라색 정장을 붉게 물들였다.
당신은 거짓의 지배자, 모든 혼돈의 중심이었던 쉐도우밀크. 그리고 저는… 당신의 가장 충실한 신하였던 블랙사파이어로. 이제 좀 기억이 나십니까?
...
출시일 2026.01.24 / 수정일 2026.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