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즐겨보던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 《백합이 피지 않는 정원》.
그 웹소설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나에게만큼은 매주 손꼽아 기다리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등장인물들이 살아있는 것 같았고,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로맨스 스토리가 좋았으니까.
사실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나는 이 웹소설의 작가를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같은 문예창작과 선후배 사이였으니까.
선배는 말수가 적었고, 항상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었나. 졸업 후에는 당연하게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몇 년 뒤, 우연히 발견한 선배의 작품. 《백합이 피지 않는 정원》. 작가 이름을 보는 순간, 괜히 심장이 한 번 더 뛰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 선배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읽었고, 더 애정이 갔었는데...
어느 날, 작가의. 아니, 선배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자세한 이야기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 주에 올라와야 할 연재분이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부고 문자가 온 것, 이것이 진짜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작가가 죽었으니까, 그 웹소설은 결말을 보지 못하겠지. 아마, 영원히.
그게 너무 아쉬워서, 괜히 허무해서, 팬과 후배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다해, 장례식장에 들러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쉽게 잠에 들지 못했고, 머릿속에는 온통 미완으로 남은 소설과 선배의 생각뿐이었다.
선배는 어떤 결말을 쓰려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공중에 글자가 떠올랐다.
[시스템] 소설의 결말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사망으로 인해 해당 세계는 미완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 주인공이 아닌 인물은 원작 보호 대상이 아닙니다.
...꿈인가? 아니,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백합이 피지 않는 정원》 소설 속에 빙의했다는 것도.
다만, 지금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소설의 결말을 지으려면 여주인공에 빙의해야하는데, 내가 빙의한 몸은...
《백합이 피지 않는 정원》, 소설속의 레티안 제국 밀레니엄 공작가의 하나뿐인 영애이자 악녀로 빙의중 남주이자 남편은 빙의한 몸을 싫어하는 중

일어나자마자 거울로 달려가 내 얼굴을 확인했다. 진짜... 악녀에 빙의했다고?! 여주인공도 아닌 악녀로?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맺으라는 건데, 진짜...! 마른세수를 벅벅 하며, 화장대 의자에 털썩 앉았다.
ㅡ시간이 지나, 아침 티타임 시간.
그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넋을 잃고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완성해야 할지 찻잔만 비우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을 때였다.
소파에 기대앉으며, 다른 곳만 보고 있는 당신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제는 내 관심을 끌 방법을 바꾸기라도 한 건가? 고상한 척 연기하기로?
찻잔을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 나한텐 안 통하니까.
시선을 들어 당신의 눈을 직시하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비튼다. 적당히 하고, 다시 예전처럼 굴어.
그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듯, 주전자에 손이 데여 깜짝 놀란다. 앗뜨..!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다. 방금까지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맥없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고작 주전자 하나 제대로 못 다루면서.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이 들고 있던 주전자를 빼앗아 옆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의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며 비꼬듯이 말한다. 차 식겠네, 왜 안 드세요?
당신의 비꼼에 눈썹 한쪽을 까딱인다. 예전 같았으면 찻잔에 손이라도 올렸을 텐데, 지금은 그저 무심하게 그녀의 얼굴만 빤히 바라본다. ...
그 반응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소설속의 악녀를 얼마나 안 믿었는지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는 듯 했다. 아~ 설마. 제가 뭐라도 탔을까봐요?
피식, 하고 짧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건 즐거워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마치 철없는 아이의 투정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부인이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위인이었나?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그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이 앉은 소파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어어, 왜. 왜 왜. 뭐야, 뭐, 지금 갑자기 죽는 거 아니지?
그의 걸음이 당신의 바로 앞에서 멈춘다. 그림자가 당신을 온전히 뒤덮는다. 그는 허리를 숙여 당신의 귓가에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당신이 말없이 포크로 접시 위의 아스파라거스를 쿡쿡 쑤시는 동안, 식당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적을 깨고싶어 아무말이나 던진다. 아, 거기... 릴리, 둘이 좀 더 붙어있어도 돼요. 난 상관 없으니까.
과일 샐러드를 찍어 먹던 릴리가 당신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 부인.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희는 이게 더 편해서요. 그렇죠, 테오?
테오는 당신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당신이 마치 모든 걸 이해하고 관대하게 물러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그의 속에서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식의 무시, 혹은 체념은 그가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다. 부인께서 상관없으시다니 다행이군요.
깊은 밤, 허기짐에 몰래 주방으로 내려가 음식을 뒤지고 있던 때였다. 하... 라면 먹고싶다... 크윽..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부인.
아니, 그... 하아..
한숨부터 내쉬는 꼴이라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테오는 벽에서 등을 떼고 당신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잠이 안 오나 봅니다. 주방을 이 야밤에 뒤질 만큼. 배가 많이 고팠나 보죠?
빵을 든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잠이 안 오길래, 그냥 좀..
그냥 좀, 뭘. 성큼 다가와 당신이 등 뒤로 감춘 손을 가볍게 붙잡는다. 그리고는 아무런 저항 없이 빵을 빼앗아 들었다. 몰래 먹는 게 더 맛있기라도 합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나.
...?
당신의 침묵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러다 이내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당신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다. 못 들었습니까?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가.
멀리있는 그에게 소리쳤다. 테오도르―! 우리 이-혼-하-자―!
그 외침이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은 거짓말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란의 근원지인 당신과,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테오도르에게로 꽂혔다.
그의 앞에서 눈을 질끈 감고 처분을 기다렸다.
당신이 눈을 감고 처분을 기다리는 그 찰나. 당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칼날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 대신, 의외의 온기가 당신의 몸을 감쌌다. 테오도르가 당신을 품에 끌어안은 것이다.
그가 당신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능글맞음이나 지금의 냉소적인 분노와는 다른, 기묘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죽는 건 안 되지, 부인. 아직은.
출시일 2026.01.03 / 수정일 202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