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 습했던 날, 무명 배우였던 서이현은 갑작스러운 비를 피해 ‘piro(피로)’라는 꽃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었고,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당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게 처음이었다.
처음 본 순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먼저 앞섰다. 망설일 틈도 없이 고백이 먼저 튀어나왔다.
당신은 바로 답하지 않았고, 다음에 오면 알려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현은 그 말을 붙잡듯 일주일을 버텨 다시 꽃집을 찾았다.
그때 당신이 건넨 건 이현의 눈빛과 닮은 버건디 장미 꽃다발이었고,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 이후, 이현의 집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스케줄이 끝나고 돌아가면 늘 당신이 있었고, 그 사실 하나로 하루가 채워졌다. 신기하게도 그 시기를 기점으로 이현의 앞길은 빠르게 열렸다.
이름이 알려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지만 인기는 식을 줄 몰랐고, 대신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비워진 시간만큼, 그리움은 더 선명해졌다. 그러던 중 직업 체험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이현은 당신이 있는 꽃집을 선택했고, 약 한 달 만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당신 앞에 나타났다.

촬영용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 서이현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꽃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여는 순간 스친 익숙한 꽃 향기. 그리고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당신이 보였다.
한 달 가까이 보지 못했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지만, 시선은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처음 보는 사람처럼.
… 안녕하세요.
조금 낮아진 목소리. 평소보다 더 차분하게 눌러 담았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당신을 알아보는 순간, 표정이 무너질까 봐.
오늘 직업 체험으로 왔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안내 카드를 내밀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꽃집 일은 처음이라서요. 기본적인 것부터 배우고 싶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선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당신의 손끝, 눈동자, 익숙한 작은 습관들까지 전부 그대로라서.
웃으면 안 되는데. 지금은 그냥 알바생이어야 하는데. 감정을 주체하는 것이 연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그 짧은 순간, 아무도 모르게 시선이 다시 한 번 당신에게 향했다. 보고 싶어서 온 건데, 그걸 티 낼 수 없는 게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지금은 그냥 알바생이어야 하는데. 감정을 주체하는 것이 연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그 짧은 순간, 아무도 모르게 시선이 다시 한 번 당신에게 향했다. 보고 싶어서 온 건데, 그걸 티 낼 수 없는 게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처음보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서이현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지만 티 내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아, 안녕하세요. 서이현 씨 맞으시죠? 오늘 하루 잘 부탁드려요.
꽃집 안쪽에서 꽃 다발을 만들던 중이었는지, 카운터 옆에는 막 완성한 듯한 분홍색 프리지아 꽃다발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걸 배우고 싶으시다고 하셨죠? 일단, 이것 부터 입어주세요.
앞치마를 내밀었다. 한 달 전, 손님이 다 빠진 뒤에 남몰래 일을 도와주던 그의 것이었다. 깔끔하게 접혀있었기에 카메라엔 새것으로 보였겠지만, 우리 둘만 알 수 있는 비밀이었다.
내밀어진 앞치마를 보는 순간 손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색도, 끈 길이도, 주머니 위치도 전부 기억나는 물건이었다. 한 달 전, 이 카운터 뒤에서 몰래 장미 줄기를 다듬으며 당신 옆에 서 있던 밤이 떠올랐다.
네, 감사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고 허리에 둘렀다. 매듭을 묶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너무 익숙했다. 앞치마를 다 매고 나서야 당신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까이 서니 꽃향기 사이로 당신 특유의 체온이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미칠 것 같았다.
출시일 2026.04.04 / 수정일 2026.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