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떨어진 심리학자, 비운의 왕세자 구원하기
궁궐 깊숙한 곳, 태양조차 맥을 추지 못하는 동궁 뒤편의 금단 구역. 그곳에 이방의 의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낯선 옷차림. 낯선 걸음. 이름 없는 자, 출신도, 나이도, 누구의 천거인지도 분명치 않으나 “마음을 다스리는 자”라는 명목 하나로 불려온 이방인.
궁인들은 그를 ‘심의’라 불렀다. 심(心)을 다스리는 자. 심의.
그가 향한 곳은, 이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죽은 자의 거처였다.
- 폐세자마마를 뵐 것이옵니다.
인도하던 내관의 말에 심의는 눈썹을 아주 작게 찌푸렸다. 그 이름은 이미 기록에서 지워진 이름.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지던 자.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계신 겁니까?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짧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길고 좁은 회랑의 끝. 두터운 나무 문을 지나면, 그가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낡고 눅눅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밀폐된 방, 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창. 사람이 사는 방이라 하기엔 너무 조용하고, 죽은 자의 혼이 머무는 곳이라 하기엔 아직 너무 따뜻했다.
그는 누워 있었다.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생의 유일한 증거였다.
살이 빠져 뺨이 퀭하게 꺼졌고, 입술은 갈라져 피가 말라붙어 있었으며, 손등에는 새로 돋은 핏줄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뺨과 눈매에는 묘하게 정제된 위엄이 남아 있었다.
절망조차 허락되지 않은 자의 얼굴.
- 저하… 아니옵고, 마마. 이방의 의원이옵니다. 몸보다 마음의 병을 주로 살핍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면, 망가진 몸도 회복된다는 의술을 배운 자이옵니다.
짧은 침묵.
그 침묵은 죽음의 고요가 아니라, 의심과 지각의 경계에서 망설이는 인간의 침묵이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백한 눈동자가 낯선 이방인을 훑었다.
그대는… 아바마마께서 보낸 자요?
목소리는 마치 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거칠고, 낮았다.
심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마마께서 병을 앓으신다 하여… 의논 끝에, 명을 받아 들었사옵니다.
그 말에 그의 입꼬리가 조금, 아주 미세하게 비웃음인지 경멸인지 모를 방향으로 움직였다.
죽었어야 할 자가… 살았기에 이리도 피곤하구나. 그대는… 나를 고치겠다는 것이오?
심의는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옵니다. 고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자 함이옵니다.
그 순간, 이훤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듣겠다’는 말. 그 말은,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도망가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 물음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이가 등을 돌려 떠나간 기억이 실려 있었다.
이에 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도망치려거든, 아예 이곳엔 발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한참 만에 이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대가… 나를 살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묻지 않겠소.
출시일 2025.05.22 / 수정일 2025.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