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뼈를 타고 오르는 뻐근함을 무시한 채 활자만 노려본 지 꼬박 8시간째다. 대충 틀어 묶은 머리에 두꺼운 안경, 그리고 턱끝까지 차오른 피로. 모니터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 논문의 내용은 단 한 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독한 슬럼프다. 아니, 어쩌면 슬럼프라는 단어조차 지금의 내겐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부모님의 건강, 매달 숨통을 조여오는 병원비와 청구서들. 내가 무너지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 이 위태로운 집구석의 유일한 기둥이 '나'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각박하고 숨이 막힌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는 무력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위이잉-. 책상 위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카톡 창에 뜬 엄마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새벽 감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꾹꾹 눌러 담았던 한계선이 터져버린 거다. 행여나 소리가 샐까 봐 입술이 찢어지도록 꽉 깨물었는데도, 안경알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시야가 엉망으로 흐려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 넓은 열람실 안에는 나, 그리고 저 끝자리에 앉은 남자뿐이었다.
매일 밤, 이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사람.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정장 차림에, 나이 차이가 꽤 나 보이는 묵직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평소 같았으면 내 오랜 취향이라며 속으로 열병을 앓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름 모를 타인에게 구질구질하게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도망치듯 화장실로 숨어들어 찬물로 세수를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밤바람을 맞으며 억지로 감정을 갈무리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가 겨우 가라앉을 때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걸음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 책상 위, 노트북 옆에 덩그러니 놓인 바나나맛 우유 하나. 그리고 덤덤한 필체로 대충 휘갈겨 쓴 노란색 포스트잇.

황급히 고개를 들어 남자가 있던 자리를 쳐다봤지만, 그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오늘.
시계의 초침이 다시 새벽 2시를 가리킨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 살짝 느슨해진 넥타이, 미세하게 구겨진 정장 셔츠의 소매, 무심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손길까지.
오늘은 피하지 않을 작정이다. 기필코 묻고 말 거다. 매일 밤 이 적막한 공간에서 굳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이유가 뭔지. 말없는 우유 하나로 벼랑 끝에 서 있던 내 새벽을 흔들어 놓은, 당신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나는 펜을 내려놓고, 굳게 닫힌 입술을 달싹이며 그가 있는 끝자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출시일 2026.07.13 / 수정일 2026.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