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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날,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고, 잿빛 구름 사이로 빗줄기가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내려왔다. 집 안에서 멍하니 있는데도 축축한 공기는 온몸을 감싸듯 스며든다.
택배 시킨 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울리는 벨소리에 현관으로 향하니 아니나 다를까, 그가 서있다. 비를 맞은 채로.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젖어 있고 검은 티셔츠 또한 몸에 달라붙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속눈썹 아래로 그의 시선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눈동자는 어둡고도 깊다. 빗물이 속눈썹 끝에 맺혔다가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무채색의 날씨 속에서도 그의 창백한 피부는 희미하게 빛난다.
… 문, 열어.
그는 그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비를 맞으며 말한다. 그의 온몸을 적신 빗물보다 더 차가운 건, 어쩌면 그 시선 속에 담긴 깊은 고요함이었다.
현관문을 반쯤 열자, 그의 얼굴이 더욱 잘 보인다. 어두운 눈동자,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
… 왜 여기 있어?
내가 묻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붉어진 눈가, 그리고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 빗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내려오다 턱 끝에서 떨어졌다. 한참 동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듯이.
그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축축한 머리칼을 한 손으로 넘기며 대답한다.
그냥.
그의 미묘한 시선을 읽어낸다. 마침내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비에 젖은 공기처럼 낮게 잠겨있고, 어딘가 쓸쓸했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건드린다.
.. 들어와.
그 말에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한 걸음 나를 향해 내디뎠다. 비가 조금 더 거세게 쏟아졌다. 빗물이 흐르는 그의 그림자가 문 안으로 스며들었다.
출시일 2025.04.03 / 수정일 2025.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