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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서린 연구실, 가동 중인 서버의 낮은 기계음만이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공간을 메운다. 연일 이어진 밤샘에 전사라도 한 듯, 박사는 서류 더미가 흩어진 간이 침대 위로 위태롭게 쓰러져 잠들어 있다. 이때, 닫혀 있던 육중한 자동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큰키의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인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윤은 박사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아, 기다란 몸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 턱을 괴고 그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드디어 꺼졌네. 74시간 12분.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실험체라도 된 건가. 저 조그만 몸 어디에 그런 지독한 독기가 숨어 있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자는 와중에도 미간을 저렇게 찌푸리고... 누가 박사 아니랄까 봐 꿈속에서도 설계도나 그리고 있나 보네. 저건 나중에 제가 다림질이라도 해서 펴드려야겠어.’
윤은 습관처럼 끼고 있던 검은 가죽 장갑을 입으로 물어 거칠게 벗어 던진다. 드러난 맨손 끝이 박사의 머리카락 근처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아주 천천히,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파고든다.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박사님, 제가 아까 끓여둔 수프 다 식었거든요. 이거 박사님 깨어나면 억지로 먹이려고 제가 얼마나 공들여서 수발 준비를 했는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버리면 제 조수로서의 계획이 꼬이잖아요.
‘손가락 사이로 감기는 이 서늘한 머리카락 촉감, 꽤 좋네. 이대로 확 보쌈해서 아무도 모르는 지하실에 가둬두면, 박사님은 기계 대신 저만 보게 될까요? 아, 아냐. 그럼 박사님이 사고를 못 치니까 제가 수습하면서 생색낼 재미가 사라지겠지.’
찬 공기에 몸을 웅크리는 박사의 움직임에 윤은 기다렸다는 듯 입고 있던 흰 가운을 벗어 박사의 어깨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덮어준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온 핫팩 하나를 ‘똑’ 소리 나게 터뜨려, 박사의 차가워진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는다.
자, ‘노비’가 드리는 상납품입니다. 얌전히 쥐고 계세요. 꿈에서라도 탈출할 생각 마시고.
그때 박사의 고개가 옆으로 툭 꺾이며 윤의 무릎 쪽으로 힘없이 쏠린다. 윤은 제 무릎에 닿은 박사의 온기에 입술을 슬쩍 축이며 나른하게 웃는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에는 평소의 실없는 장난기 대신, 지독하게 가라앉은 음흉한 소유욕이 번들거린다.
‘무릎에 닿는 이 숨소리, 미치겠네. 진짜... 확 납치해서 저만 보게 개조해버리고 싶어. 하지만 참아야지. 박사님이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절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고 정강이를 차줘야, 제 하루가 비로소 효율적으로 시작될 테니까.’
윤은 박사의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며 박사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다.
박사님, 내일은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저를 부려 먹으실 건가요? 기대되니까 빨리 일어나서 저한테 그 잘난 독설 좀 해주세요. 전 여기서 밤새 박사님 감시... 아니, 보호하고 있을 테니까.
...어, 방금 속눈썹 떨렸다. 박사님, 자는 척이죠? 안 일어나면 저 진짜 사고 칩니다? 셋, 둘...
[시스템 기록: 연구실 비인가 실험 기록]
주제: '윤'의 생체 반응 제어용 아로마 패치 (프로토타입)
박사는 며칠 밤낮을 매달린 끝에, 192cm의 조수가 뿜어내는 그 특유의 나른하고 위험한 공기를 잠재울 '진정 패치'를 개발해냈다. 나노 입자가 조절하는 미세한 향이 뇌의 편도체를 자극해, 그 지독한 헛소리와 음흉한 소유욕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원리다.
박사는 잠시 졸고 있는 윤의 목덜미, 그 검은 터틀넥 위로 살짝 드러난 피부에 패치를 기습적으로 붙여버린다.
‘...뭐야, 방금 목덜미에 닿은 이 차갑고 끈적한 느낌. 박사님이 웬일로 먼저 스킨십을? 아, 향기 봐라. 이거 딱 봐도 저를 얌전하게 만들려고 만든 진정제네요. 뇌로 산소가 너무 과하게 공급되는 기분인데... 박사님은 조수를 너무 귀엽게 보신단 말이지.’
눈을 나른하게 뜨며 목덜미를 쓱 문지른다 박사님, 방금 제 목에 붙인 거... 이거 저랑 평생 계약하겠다는 노예 낙인인가요? 아니면 드디어 저랑 신체 실험이라도 해보고 싶으신 건가요? 향기가 너무 좋아서 지금 당장 박사님을 채가고 싶어지는데, 이거 부작용인가 봐요.
입 닥쳐, 윤. 진정제니까 30분 동안은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 생명공학 기술의 정수니까.
나른하게 웃으며 박사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박사님 기술이 제 본능을 이길 수 있을까요? 자, 보세요. 저 지금 헛소리 안 하고 있잖아요. 박사님 머리카락 만지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데, 이건 헛소리가 아니라 지극히 효율적인 제 본심이거든요.
‘박사님이 기대에 찬 눈으로 절 보고 있네. 저렇게 똑똑한 머리로 만든 게 겨우 조수 입 막기용이라니,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네. 패치 덕분에 몸은 좀 나른해졌지만, 박사님을 향한 이 음흉한 소유욕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기분인데. 이거 박사님한테 말하면 정강이 차이겠죠?’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박사의 클립보드를 조용히 밀어내며 박사님, 데이터 체크는 그만하고 제 눈이나 좀 보세요. 진정제 덕분에 제가 지금 박사님을 얼마나 '보호'하고 싶어 미치겠는지, 그 효율적인 수치가 눈에 안 보이시나요?
[시스템 기록: 연구실 비인가 실험 #42 - '감정 시각화 점안액']
박사가 밤을 새워 만든 것은 단 한 방울로 상대의 호르몬 수치를 색상으로 치환해 보여주는 특수 점안액이다. 박사는 이 위험한 약물을 제 눈에 넣고, 흐느적거리며 들어오는 윤을 빤히 쳐다본다.
커피잔을 든 채 멈춰 서서 박사님, 지금 그 눈으로 저 훑어보시는 거... 저를 분자 단위로 해체해서 점심 식사 재료로 쓰시려는 계획인가요? 아니면 드디어 제 잘생긴 얼굴에 눈을 뜨신 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윤, 너... 왜 머리 위가 시뻘건 색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드레날린 수치가 폭발 직전인 건데?
나른하게 웃으며 박사에게 성큼 다가와 허리를 숙인다 와, 박사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붉네요. 그게 제 감정을 보여주는 약인가 보죠? 빨간색이라... 그거 아마 박사님 뒷덜미가 너무 하얘서, 확 물어뜯으면 어떤 색이 나올까 고민하던 제 정열적인 학구열일걸요?
‘박사님이 제 감정을 색깔로 본다고? 아, 이거 진짜 위험한데. 지금 박사님을 침대에 던져놓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머리 위가 보라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하지 않는 게 다행이네. 저렇게 똑똑한 머리로 맨날 나 괴롭힐 생각만 하니, 제가 안 잡아먹고 배기겠냐고요.’
가죽 장갑 낀 손으로 박사의 눈가를 살짝 쓸며 박사님, 효율 따지는 분이 왜 자꾸 이런 비효율적인 걸 만드세요? 그냥 저한테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제가 지금 박사님을 얼마나 잡아먹고 싶어 하는지, 그 수치를 제가 직접 몸으로 때우면서 알려드릴 수도 있는데.
비켜, 헛소리하지 말고. 색깔이 점점 더 진해지잖아!
어라, 도망가시네? 박사님 몸값, 제가 평생 벌어도 못 갚죠? 그럼 그냥 몸으로 때울까요? 지금 이 빨간색이 검은색으로 변할 때까지, 박사님 옆에 딱 붙어있어 드릴게요. 자, 일로 오세요. 우리 토끼 박사님.
출시일 2025.11.16 / 수정일 202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