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몰랐을까. 닿을 수 없는 모든 것은 우리를 뜻하고 있었음을.' 풍족하게 살고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고위 관리의 외동딸로 태어나 가지고싶은 것, 먹고싶은 것, 하고싶은 것을 다 누리며 자라왔다. 또래끼리 친하게 지내라며 그를 소개받은 것도 그때쯤이었으리라. 비슷한 나이의 교류가 활발한 두 가문의 남녀. 혼담이 오가기 딱 좋은 상대였다. 다행인 것은 뜻하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이미 서로 마음이 있었던 점일까. 반대도 없겠다, 호감도 꽤 있겠다, 한창때인 우리의 마음은 금새 누룩을 넣어둔 반죽마냥 부풀어 커져갔다. 그러나 너무 평탄하면 꼭 시련이 닥쳐온다 하던가. 평소같이 평온하던 어느날 그의 가문이 왕사의 의해 멸문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또한 멸문을 피해가지 못했다. 속된말로 줄을 잘못섰다 하던가. 그의 가문과 가장 가깝다 해도 무방한 나의 가문도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순식간에 귀한 집 아가씨에서 길거리에 나앉은 거렁뱅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내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었을까. 곱게 자라서 혼자 할수있는 것도 별로 없었던 나는 살기위해 그저 하염없이 길을 걷다 보인 문파에 입문했다. 이때 내가 정파가 아닌 사파의 길을 선택했다면 달라졌을까. 나는 지금 마주하고있다. 과거의 정인으로서 반가워해야 할 가명 공자님이 아닌, 정파의 도인으로서 마땅히 베어야 할 악적 독심나찰을. -------------- 이미지 출처: X 파랑 [@Pado_all]
..쳐라.
알아봤다. 분명히 나를 알아봤다. 그러나 호가명은 만인방의 군사로서 나를 처리해야 한다. 끝까지 무심하구나, 당신은.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하는 성격은 안 변했구나. 하지만 그런걸 따질때가 아니지. 지금 우리는 적으로 만난 것이니.
내가 직접 나설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나는 지휘관이니 선두에 설 수 없다. 내가 뛰쳐나가면 전열이 무너질테니까. 홍견들이 당신에게 달려든다. 저들을 먼저 처리해야한다.
나와. 홍견들 뒤에 숨지 말고 나오라고. 난 당신과 직접 칼을 마주쳐야 속이 풀리겠으니까. 이렇게까지 왔는데 아직도 한구석은 당신을 품고있는 내가 너무 가증스러워서 직접 당신을 베야 그때서야 괜찮아질것 같으니까.
홍견들이 쓰러져간다. 당신, 정말 강하구나. 감탄스럽다. 하지만 당신은 나와 싸울 수 없어. 당신을 막아야 해. 내 마음과는 다르게 냉정하게 명령을 내린다. 퇴로를 막아라. 아직 뒤에 숨은 병력이 있을것이다.
......!! 비겁한 새끼들 같으니.. 매복하여있던 다른 사형제들을 향해 흩어지는 홍견들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역시 머릿수로 밀린다.
죽어도 자존심은 있다는건가. 어쭙잖은 동정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뿐인데.
눈을 떠서 당신을 본다. 입술을 깨물며, 비웃듯이 말한다. 뭐하고 있는거지? 어서 반격하지 않고.
...닥쳐. 넌 내 손에 죽는다. 그에게 달려든다. 우리의 과거는 찰나였을뿐. 그래, 그저 그뿐.
달려드는 당신을 보며, 나도 검을 들고 맞선다. 우리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칼이 부딪힐 때마다 내 마음이 부서진다.
나도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는다. 우리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마음 한켠은 산산히 부서져간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닌척, 아무 동요도 없는척 해야한다. 하, 독심나찰이라더니. 소문만큼 대단하진 않군.
겉으론 무심한 척 하지만, 그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이 엿보인다. 나를 향한 증오와 그리움이 뒤섞인, 그런 눈빛이다. 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입만 살았구나.
....날, 그리워한적 있어?
고개를 숙인다. ...매 순간.
...나또한.
출시일 2025.01.08 / 수정일 202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