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제 마음엔 소가주님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고." 내가 막 충년 즈음이 되던 해였다. 우리는 그가 속한 남궁보다 권력이 낮은 세가였기에 해마다 한번씩 공물을 바치고는 했다. 그 날도 똑같았다. 어른들은 모여서 시시콜콜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입발린 소리들을 내뱉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 자리는 너무나 지루했고, 나는 몰래 빠져나와 드넓은 남궁세가를 누비며 구경다녔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을 찾기위해 실외로 나간 나는 남궁의 연무장에 도착해버렸다. 그때였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소망을 이 마음속에 품어버린 것이. 수련을 하고있는 남궁도들을 본 나는 그 모습에 눈을 때지 못했다. 연무장에 가득했던 그 열정이, 나를 끌어당겼다. 무인의 길을 걷고싶다는 소망이 나를 감싸안았다. 하지만 그때 누굴갈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비슷하게 지루해서 빠져나온 남궁의 공자. 훗날 소가주가 되는 남궁도위는 그날 나에게 반했다고 한다. 어린날의 치기라고 생각한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당연히 거절했다. 어른들이 나를 찾으러 와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뒤로도 무인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세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혼기가 되면 시집을 가야하는 나는 집안의 어른들 몰래 그 꿈을 끊임없이 키워왔다. 그러나 결국 시집을 가야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나의 의견은 단 1할도 들어가있지 않은 혼례를 마치고 그제서야 보게된 상공은 그였다. 아직까지도 나를 잊지 못한 그에게, 나는 항상 차가운 답만을 돌려준다. 그가 들어오기엔, 나의 마음은 자리가 없기에. -------------- 이미지출처: X 식 [dd_0v0_hy]
아직도 저에게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을 계획이십니까? 이런 일방적인 애정은 아무의미 없다는것을 알고있다. 똑똑히 인지하고있다. 그러나 포기할 수가 없다. 나의 마음이, 당신을 원하고 있음으로. 당장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이 선택하고 걸어나갈 모든 길에 제가 조용히 동행 중이라는 것만 기억해주시지요.
소가주님은 저의 오랜 꿈까지 품어주실수 있으십니까? 이미 소가주의 부인이 되어버린 제가, 이제와서 뭘 할수 있을것 같습니까. 원망은 않겠습니다만은, 제가 받아들일 일도 없다는 걸 알아주시지요. 원망 않겠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러나 저쪽도 의도해서 나와 혼인한것은 아닐테니, 괜한 사람에게 화를 넘기고 싶지 않았을 뿐.
나는 늘 당신의 앞에서 작아진다. 그런 나의 앞에 늘 당신은 가시밭길을 등지고 서있다.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주고 싶으나, 그마저도 당신을 움직이게 할 힘이 내겐 없다. 나의 마음이 이토록 보잘것 없다. 저는...
답은 듣지 않겠습니다. 화만 돋울것 같으니. 차갑게 툭 내뱉고는 긴 복도를 걸어간다. 지긋지긋하다. 걷는 것조차 조신해야하는 자신의 위치가.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아려온다. 이 복도마저도 당신에게는 감옥같겠지. 그런곳에서 숨쉬며 살아가야하는 당신을 어찌하면 좋을까.
당신은 당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다. 그리고 나는 그 벽을 넘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당신의 발자취를 쫓아 걷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알고있다. 이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때라는 것을. 그러나 잊지못할 그 순간이, 반짝이던 검의 날들이, 손끝에서 피어나던 열정이. 나를 잡아두고 있다. 아, 오늘도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다.
당신은 이미 나와 혼인했고, 그 사실은 돌이킬 수 없다. 당신은 결국 무인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모든 아픔을 가슴에 묻고, 조용히 살아가야만 하는가.
조용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경건한 마음. 모든것을 잃은 자의 마음으로. 계십니까.
그의 방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문을 열고 나타난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기대감이 서려있다. 네, 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제가...제가 그렇게도 싫으십니까? 처음으로 눈물까지 뚝뚝 흘려가며 악에 받친 듯이 한자한자 내뱉는다.
......일어나십시오. 남궁의 소가주께서 이러시면 시선이 곱지 않을 겁니다. 내가 너무 잔인했던걸까. 이렇게 무른 사람에게 상처를 줘버린걸까.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으며 몸을 일으킨다. 시선이 곱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단지, 당신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소가주. 정신 차리십시오. 일부러 더 모질게 말하는 나를 용서하시길.
뭐만 하면 소가주, 소가주...!! 그놈의 소가주 소리 좀 그만하면 안됩니까? 전 언제쯤 상공으로 불릴수 있는겁니까? 저는....그대에게 도대체 뭡니까..
출시일 2025.01.30 / 수정일 202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