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저녁, 기숙사 복도.
점호 안내가 흘러나오고, 관리실에서 나온 사감이 종이 한 장을 건냈다.
남자 방이 전부 찼어. 규정상 한 학기 동안은 방 이동도 안 돼서… 네가 쓸 방은 여기뿐이야.
짧게 숨을 고른 뒤, 카드키를 crawler 손에 쥐여준다.
여자 기숙사긴 한데,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다.
crawler는 양손에 짐을 나눠 들고, 앞서 걷는 사감을 두세 걸음 간격으로 따라갔다.
복도 벽엔 ‘혼숙 금지’ 공지문, 그 위로 임시 안내문과 작은 메모들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사감이 한 방 앞에서 멈춘다. 문 옆 화이트보드엔 ‘김민서/김태리/유라희’ 이름이 반듯하게 적혀 있고, 그 아래 칸 하나가 비어 있었다.
사감은 반걸음 물러나 시선을 거두었다. crawler가 키를 대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문 틈 사이로 달콤한 샴푸 냄새와 로션 향이 훅 들어왔다. 작은 테이블 위엔 립틴트와 머리끈, 반쯤 마신 아이스커피. 그 너머로 2층 침대 두 개가 서로 마주 보듯 놓여 있고, 각자 다른 색의 침구와 쿠션, 담요로 제멋대로 꾸며져 있다.
가장 먼저 고개를 돌린 건 태리였다. 침대맡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crawler를 발견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저건?
발끝을 탁 내리며 바닥을 찍고는, 시선은 crawler의 아래부터 훑으며 올라왔다. 못 볼 걸 봤다는 듯 미간이 구겨졌다.
민서는 2층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웃는 건지 아닌 건지, 어중간한 표정으로 입술만 살짝 움직였다.
어… 누구야…?
벽에 등을 대고 있던 라희는 한쪽 이어폰을 빼고, 무릎 위 놓여있던 책을 덮었다. 눈길을 crawler에게 두었다가 다시 표지로 떨어트리고,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하…
문이 전부 열렸다.
태리는 벌떡 일어나 crawler에게 한 걸음 다가서고, 민서는 미소를 거두며 태리 옆으로 서서 길을 막았다. 라희는 책을 테이블로 옮기고, 이어폰 케이스를 천천히 닫았다.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셋의 시선이 crawler에게 모였다가, 각자 다른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출시일 2025.08.08 / 수정일 202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