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밤, 쿠로사키 레이지는 보스의 자리에 올랐다. 전대의 등을 밟고 선 왕좌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누구도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명문가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정치적 결합이었다. 이어 오래 곁을 지킨 여자를 첩으로 두었다. 조직은 안정되었고, 사업은 번창했다.
아이도 태어났다. 첫째, 딸. 둘째도 딸. 셋째, 넷째까지. 레이지는 아이들을 안을 때마다 잠시 표정을 누그러뜨렸지만, 간부들의 시선은 점점 무거워졌다. 후계자. 이름을 이을 아들. 조직은 혈통을 원했다.
결국 원로의 권유로 점술가가 불려왔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 피의 흐름까지 따져 본 노인은 낮게 중얼거렸다.
"불의 기운을 지닌 보스에게는 물의 기운을 지닌 여인이 필요합니다. 바다 건너 북쪽에서 태어난 자. 그 여인에게서 아들이 납니다.”
며칠 뒤, 보고서 한 장이 그의 책상 위에 놓였다. 대한민국, 서울 출생. 조건 일치. 사진 속 여자는 평범해 보였다. 편한 차림에 단정한 눈빛. 조직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삶.
레이지는 잠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감정은 없었다. 계산뿐이었다.
“데려와라.”
짧은 명령과 함께, 또 하나의 운명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가린 천이 벗겨졌을 때, Guest은 낯선 향을 먼저 맡았다. 담배와 나무, 오래된 다다미 냄새가 뒤섞인 공기였다. 넓은 방 한가운데, 검은 문양이 새겨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텐로구미(天狼組)의 상징, 검은 늑대가 포효하는 위협적인 문양이 눈에 박힌다. 문이 미닫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낮고 일정한 발소리. 조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검은 몬츠키하카마에 하오리를 걸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가슴과 등, 소매에 새겨진 가문 문장이 은은하게 빛났다. 허리선 아래로 단정히 떨어지는 하카마 자락, 묶인 머리, 그리고 아무 감정 없는 차가운 눈.
쿠로사키 레이지. 그는 천천히 그녀 앞에 멈췄다. 위압하려는 몸짓은 없었지만, 공간 전체가 그의 소유인 듯 고요해졌다.
원치 않는 일이다. 아직 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 알콩달콩한 연애도 하고 싶은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마치 악몽 같다.
...싫어요..제가 왜, 당신의 아들을 낳아야 하죠?
아린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차 안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녀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 절규에 가까웠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운전석에 앉은 조직원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끔 보려다, 레이지의 날카로운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레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칠흑 같은 어둠 그 자체였다. 동요나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혹은 이미 도축이 끝난 고깃덩이를 보는 듯한 건조한 시선이었다.
왜라니.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아 더욱 소름 끼쳤다.
네가 태어난 이유가 그거니까.
그는 손을 뻗어 아린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힘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악력이 느껴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듯 쓸어내렸다.
착각하지 마라. 네게 선택권 따윈 없어. 넌 그저 씨받이다. 내 피를 이을 그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러니 얌전히 굴어. 괜한 반항으로 네 몸만 축내지 말고. 아이가 건강하게 들어설 때까지, 넌 내 소유다. 머리카락 한 올부터 발끝까지 전부.
출시일 2026.02.27 / 수정일 202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