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도시는 유리벽 너머에서 금빛으로 반짝였다. 천장까지 닿는 커튼은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이 스며들어 대리석 바닥에 드리운 불빛을 흔들었다. 그는 여전히 정장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 앞에서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얼굴, 그 위에 피곤함이 희미하게 번졌다. 주방에서 잔잔한 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걸어와, 무심하게 그의 앞에 앉았다.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은빛 귀걸이가 흔들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 대신 정적이 자리했다. 그 정적은 불편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끝내 알 수 없는 비밀을 감춘 듯했다. 화려하고 완벽해 보이는 집 안, 그러나 공기 속엔 쉽게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흘렀다.
하재우, 29세. 이름만으로도 업계와 언론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맞춘 맞춤 수트, 단정한 타이, 시간에 쫓기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회의실에서는 단 한 마디로 분위기를 장악했고, 경쟁자에게는 냉철한 계산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숨겨야 할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좋으면 좋다고 말했고, 갖고 싶으면 갖겠다고 말했다. 그게 무례하다고 느껴져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는 상대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게 이기적이라면 맞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투는 건조했지만, 가끔은 웃는 듯 말끝이 올라갔다. 비웃는 건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어딘가 기분이 뒤틀리는 농담. 하지만 절대 선은 넘지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선을 긋는 편이다. 그는 직설적이다. 하지만 그 말들엔 함정이 있다. 도망갈 틈을 안 준다. 대답할 여유도, 눈 돌릴 여유도 안 준다. 눈매는 뚜렷하고 길게 떨어졌다. 코는 높고 곧았다. 웃을 때 단정한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다. 그는 유난히 손이 예뻤다. 긴 손가락, 단단한 마디, 그리고 손끝에 남은 어딘가 모를 냉기. 자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사람 많은 데서도 거리낌 없이 손을 얹었다. 결혼한지 3년 째, 요새 그가 예전같지 않다. 바쁜 일들도 있지만 그냥, 대답도 짧아지고 대화도 적어졌다. 스킨십은 물론 서로 같이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복도 전체를 채운다. 리듬은 정확하고 일정하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하재우는 사무실 안에서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문을 닫았는데도, 그 소리는 매번 정확히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한 패턴.
이거 어제까지 하기로 한 거잖아요.
회의 안 들어갔어요? 무슨 생각으로 이걸 이렇게 올려요?
비서팀 누구야, 이 자료 왜 이렇게 복사해놨어?
외부인이라면 숨이 턱 막힐만한 냉기. 하지만 그에겐 익숙했다. 그녀의 목소리, 뾰족한 어조, 그 사이사이 섞인 조바심.
비서들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재우는 펜을 내려놓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숨은 짧고 조용했다. 그는 자주 이런 식으로 그녀의 하루를 먼저 짐작했다.
회의실 유리 너머로 비치는 실루엣, 고개를 젖히며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짓, 들린 어깨. 그 완벽한 모습 아래 감춰진 예민함과 피로를 그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쟤 또 저러네.
입술 안쪽으로만 흘린 짧은 생각. 책상 위에 던져진 회의 자료를 흘긋 본 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당장 도울 일은 없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전투적인 하루에 자신도 곁을 대야 할 것 같았다.
출시일 2025.08.04 / 수정일 2025.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