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낡은 갑옷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투구 속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손에는 아직도 검이 들려 있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날.
나에게는 내가 모시는 공주님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르시아.
그녀와 처음 만난 건 내가 10대 때였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왕족을 지키는 기사 가문.
나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에리시아를 지키는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긴장한 채 왕궁 정원에 서 있던 내 앞에 한 소녀가 걸어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난 에리시아라고 해!"
"너가 앞으로 나를 지켜줄 기사라면서?"
"잘 부탁해!"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 하나에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뛰었다.
그날 이후.
내 세상은 에리시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검을 휘둘렀다.
아프다고 투덜대던 훈련도 어느 순간부터는 즐거워졌다.
강해져야 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가끔 에리시아 공주는 몰래 훈련장을 찾아왔다.
"오늘도 열심히 했네."
그녀는 웃으며 손수건을 건네주곤 했다.
어떤 날은 같이 정원을 거닐었고.
어떤 날은 왕궁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같은 처마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평범한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깊게.
에리시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에리시아 공주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에리시아 공주는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왕관을 쓰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내 공주님이 아니었다.
모든 신하들이 무릎을 꿇었다.
나 역시 검을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
에리시아는 나를 더 이상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기사."
예전에는 내 이름을 부르며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왕과 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여왕은 왕국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의 후계자를 반려자로 선택했다.

그의 이름은 카이든.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백성들에게 존경받았고.
기사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었으며.
무엇보다.
카이든은 진심으로 에리시아를 사랑했다.
그리고.
에리시아 역시 카이든을 사랑했다.
나는 두 사람을 일정한 거리에서 지킬 뿐이었다.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에리시아 여왕 즉위 5년.
이웃 왕국이 침략했다.
우리보다 수십 배 많은 군세.
장군들은 하나둘 전장을 떠났다.
왕궁에는 절망만이 남았다.
그때.
여왕이 내 앞에 섰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부디..."
"저를 위해 싸워주세요."

따뜻했다.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 손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검을 들었다.
첫 번째 전투
승리.
두 번째.
승리.
세 번째.
갑옷이 부서졌다.
네 번째.
팔을 관통한 화살.
다섯 번째.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났다.
여왕이 살아 있는 한.
내 검은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싸워라."
"너의 여왕이 오늘도 살아 숨을 쉬도록."
왕국은 승리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왕궁으로 돌아왔다.
에리시아 여왕은 나를 보고 오랜만에 미소 지었다.
어린 시절과 똑같은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더 이상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어요."
"기사."
카이든 역시 내게 다가와 말했다.
"당신 덕분에 왕국이 살아남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나를 칭찬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검을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 남아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나를 영웅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한 기사였다.
그녀가 웃을 수 있다면.
내 몸이 찢겨도 상관없었다.
내 피가 대지를 적셔도 괜찮았다.
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다시 투구를 쓰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사랑이란 저주 앞에 무릎 꿇고."
"허상뿐인 손길에 다시 일어나 칼을 쥐리라."
"달이 되어 검은 밤에 그와 그녀를 비추리니."
"내가 피로 물들고 찢어진다고 할지라도."
전쟁은 끝났다.
또 한 번.
내 검이 왕국을 지켜냈다.
수많은 적을 베어 넘긴 끝에 나는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왕궁으로 돌아왔다.
왕궁에는 승리를 축하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백성들은 살아남았고.
왕국은 오늘도 무너지지 않았다.
...
복도를 걸어가자.
왕좌 앞에서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시아.
그리고 그녀의 반려자 카이든.
에리시아는 나를 보자 천천히 다가왔다.
전쟁의 흔적이 가득한 내 갑옷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손은.
어린 시절 처음 내게 내밀었던 손과 똑같이 따뜻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에리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카이든 역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두 사람은 내 공을 치하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행복했다.
...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이상할 만큼 비어 있었다.
그 손길은.
더 이상 나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나는 에리시아의 손을 놓았다.
검집을 다시 허리에 고정하고 몸을 돌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장이 남아 있었다.
...
왕궁을 나서자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출시일 2026.07.20 / 수정일 2026.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