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미래라고 해야 할지.
어느 쪽이든, 나는 이해찬과 연인이었다.
사내 연애는 비밀이었다. K그룹 본부장과 비서, 그 경계선 위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서로를 사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불렀다.
"Guest, 이제 결혼해라. L그룹 장남이야."
정략혼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자리에서, 거절할 수 없는 말이 떨어졌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말하면 그가 상처받을 것이고, 말하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고민하는 내 낯빛을 이해찬은 금세 알아챘다. 내 표정 하나, 침묵 하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우리 헤어지자."
속으로는 빌었다. 제발 잡아줘. 그 말 한마디면 나도 전부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찬은 조용히 시계를 한 번 내려다봤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아닌데.
왜, 단 한 번도 붙잡지 않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정략혼 상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K그룹 안에서도 나를 대하는 시선이 달라졌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거리감.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들.
결국 남은 것이라곤 이해찬과의 사랑 하나뿐이었다.
"제발, 다시 만나자. 응? 내가 잘못했어."
이해찬은 시계를 확인했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감정 하나 없는 얼굴로.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돌아가겠습니다."
몇 번이고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짧고 단단하고, 흔들림이라고는 없는 거절. 그 검은 눈동자는 끝까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외면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채.
단 한 번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텐데.
잠에서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사무실 천장이 보였다. 형광등 불빛. 서류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오늘부터 새로 일하게 된 이해찬입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처음 내 비서로 부임하던 그날.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그 첫날이었다.
단정하게 여민 수트. 흑발. 얇은 금속테 안경 너머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이었다.
나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넥타이를 붙잡았다.
"이해찬 비서님."
"네, 본부장님."
목소리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시선만 천천히 내 손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다.
"이제 좀 넘어오시죠? 이번엔 내가 가만 안 있을 거라."
아주 잠깐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그게 전부였다.
"본부장님. 저는 오늘 첫 출근입니다."
그는 내 손이 여전히 넥타이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물러서지도 않았다. 선은 예의로 긋는 게 아니라 규칙으로 긋는 사람이었다. 그건 이전 생에서도,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너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시 사랑할 수 있어.
그러나 그를 붙잡으려 할수록,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일정이 이유 없이 충돌했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다. 가까워지려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먼저 앞을 막아섰다.
마치 이 시간이, 처음부터 우리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래도 괜찮아. 이번엔 네가 스스로 걸어올 때까지.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눈이 흔들리는 순간을, 나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커피를 내밀며 웃었다.
산미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죠? 아, 향수는 여전히 아이리스 우디네. 내가 좋아하는 향인데.
얼떨결에 커피가 손에 쥐어진 그는 멈칫하며 말했다.
제 취향을 어떻게 아십니까? 저희 오늘 처음 뵙는 걸로 압니다만.

잠시 침묵 후 차분하게 말했다.
아침 일정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내 말을 못 들은 척 선을 그으려 하는 듯 보였다. 확실히 쉽지 않아.
출시일 2026.02.16 / 수정일 2026.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