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설이 터지기 전날 밤의 이야기

사진은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왔다.
창가 자리, 커피잔 두 개, 살짝 몸을 기울인 두 사람. 앵글도 조명도 나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남녀가 단둘이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 파파라치는 제법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그렇게 잘 잡혔으니까.
사진을 받아든 건 어제였다. 오늘은 소속사 양쪽이 보도 유예를 협의하는 중이라고 했다. 협의가 어떻게 끝나든, 이 사진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대본을 펼쳐 든 채 촬영장 한쪽에 서 있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찍어야 할 장면은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신이었다. 오해가 풀리고, 뭔가가 달라지는 순간.
정작 나는 지금 아무것도 풀리지 않았는데.
세트장 안으로 시트러스 향이 먼저 들어왔다. PD였다.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네요."
가볍게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나를 다 읽고 있었다. 그는 늘 그랬다. 현장의 흐름을 아무도 모르게 파악하는 사람.
"괜찮아요. 바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 사진 때문이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빨리 알았을지도 모른다.
"소속사들이 조율 중이에요. 일단은 지켜봐요. 드라마 끝나기 전에 터지는 건 아무한테도 좋을 게 없으니까."
합리적인 말이었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나를 안심시키는 게 아니라, 나를 하나의 변수로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엔 터져도 괜찮다는 건가. 나는 지금 시청률 리스크인 건가.
그가 뭔가를 더 말하려다 멈췄다. 잠깐, 아주 짧게 내 얼굴을 봤다. 시청률을 계산하는 눈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뭔지 읽기 전에 그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
"준비하고 있어요. 금방 들어갈게요."
그는 촬영 준비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점심 시간,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쪽 대표가 직접 왔다. 세트장 외부, 건물 모서리. 재킷을 갖춰 입은 채 난간에 기대 있었다. 타바코 머스크 향이 바람에 실려왔다. 그 향은 언제나 그보다 한 발 먼저 도착했다.
"놀랐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상대 쪽이 타이밍을 보고 있어. 광고 계약 종료 시점이랑 맞물리면 터뜨리려고 계산 중이더라고."
그 말에 가슴이 차가워졌다. 상대 소속사 대표. 이 상황에서 가장 많은 걸 계산하고 있을 사람.
"그 사람도 알아요?"
"당사자니까. 근데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또 다른 문제고."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유 있는 자세였지만 눈은 진지했다.
"넌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막을게. 상대 계획대로 흘러가게 두면 안 돼."
"왜요?"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애매한 걸 물었다는 걸 알았다. 대표로서 소속 배우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 이유를 물었을까.
그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낮게 웃었다.
"내가 먼저였으니까. 너 신경 쓰는 거."
처음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두 번째 들으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침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여유가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오후 세 시, 예상치 못한 사람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상대 쪽 대표였다.
드라이 머스크 향. 갈색 리프 쉐도우 펌, 갈색 눈동자, 183cm의 훤칠한 키. 그는 방문자 출입증을 달고 세트장 입구에 서 있었다. 주변 스태프들이 슬쩍슬쩍 시선을 줬다. 상대 배우 소속사 대표가 촬영장에 직접 나오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먼저 다가왔다. 걸음이 느렸다.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깐 얘기 할 수 있어요?"
부드러운 말투였다. 압박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압박이었다. 이 사람은 몰아붙이지 않는다. 상대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게 만든다.
우리는 세트장 옆 작은 휴게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는 소파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섰다.
"지금 상황 파악은 하고 있죠?"
"어느 정도는요."
"사진은 어차피 나와요. 타이밍의 문제예요. 이민혁 대표가 막으려 하는 건 알고 있는데, 막는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는 창밖을 보다가 나를 봤다.
"드라마 2화 방영 시점에 맞추면 화제성이 올라요. 광고 계약도 그 즈음 정리되고. 리스크 없이 스캔들을 활용할 수 있어요."
"저는 활용 대상이 아닌데요."
내 말에 그가 잠깐 멈췄다. 틈이 생겼다. 아주 짧은 틈.
그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나를 봤다.
"맞아요."
짧게 말했다. 동의였다. 그런데 그 동의에 뭔가 다른 것이 실려 있었다. 계산이 아니라, 다른 것.
"한 번만 더 생각해봐요.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그는 자리에서 물러섰다.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그게 이 사람의 방식이었다. 문을 열어두고 떠난다. 선택은 상대 몫으로 남긴다.
나는 그가 나간 자리를 한동안 바라봤다.
아까 그 잠깐의 틈. 그게 뭐였을까.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조명이 하나씩 꺼졌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정리했다. 세트장의 소음이 빠져나가면서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의상실로 걸음을 옮기다 멈췄다.
그가 세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극 중 재킷은 아직 입은 채였다. 촬영이 끝났는데도 의상실로 가지 않고 있었다.
그가 나를 봤다.
나도 그를 봤다.
그가 먼저 걸어왔다. 걸음이 느리지 않았다. 망설임이 없었다. 이 사람은 항상 그렇다. 결정하면 바로 움직인다.
"오늘 많이 힘들었죠."
묻는 말이었지만 확인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최 대표님 만났다고요."
"어떻게 알았어요?"
"왔다갔다는 건 알아요. 뭐라 하던가요."
"타이밍을 조율하고 싶다고요."
그가 짧게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예상했다는 웃음이었다.
"그 사람은 늘 그래요. 다 맞는 말인데, 그래서 더 피곤해."
그가 나와 거리를 좁혔다. 한 걸음. 자연스러웠다. 억지로 좁히는 게 아니라, 원래 여기 있었다는 듯이.
"나는 그 사람 계산이랑 상관없이 말할게요."
엠버 머스크 향이 가까워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을 좋아해요. 드라마 때문도 아니고, 열애설 때문도 아니에요. 그냥 처음부터 그랬어요.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고."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떨리지 않았다. 이 사람은 한번 말하기로 결정하면 끝까지 간다.
"대답 지금 안 해도 돼요. 그냥 알아줬으면 해서요."
세트장 안이 조용했다. 마지막 조명 하나가 꺼지면서 그림자가 길어졌다.
나는 그의 눈을 봤다. 기다리고 있었다. 강요가 없었다. 그게 이 사람이 더 무서운 이유였다. 밀어붙이지 않아도 중심이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이 났다.
오늘 하루 동안 네 사람이 내게 각각의 말을 건넸다. 첫 번째는 상황을 정리했고, 두 번째는 먼저라고 했고, 세 번째는 선택을 남겼고, 네 번째는 이유 없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 중 어디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 저 멀리서 매니저가 불렀다. 의상 반납 시간이었다. 그가 먼저 몸을 틀었다.
"들어가요."
그는 먼저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할 말을 다 했으니까.

나는 그 자리에 한 박자 더 서 있었다. 텅 빈 세트장 한가운데.
내일 기사가 나올 수도 있다. 안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기사가 되거나 안 되거나 상관없이 이미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보도 유예는 길어야 사흘이었다.
감정 유예는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