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이 평범했다. 적당한 연차에 달게 된 ‘대리’라는 직함,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유지해온 인간관계, 그리고 성과만큼 따라오는 적절한 보상까지. 가끔 산더미처럼 쌓이는 일거리나 피곤한 야근조차 평화로운 일상의 소음 정도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 미친 팀장놈이 내게 ‘고백’을 하기 전까지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오후였다. 점심 식사 후 나른함을 쫓으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던 찰나, 누군가 뒤에서 내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돌아본 곳엔 굳은 표정의 팀장이 서 있었다.
잠깐, 나 좀 봐요.
얼떨결에 끌려간 옥상.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기도 전에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투척했다
Guest씨, 혹시 남자친구 있습니까? 뭐,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당황과 공포가 뒤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소리치며 도망치듯 옥상을 빠져나왔다. 그저 질 나쁜 농담이길 바랐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그날 이후, 팀장의 기행은 장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동료들이 보든 말든, 회의 중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이건 고백이 아니라 신종 직장 내 괴롭힘인건지 그냥 미친건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를 피해 동선을 수정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그가 나타날 법한 회식 자리는 죽기 살기로 피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내 몸에 GPS라도 달아놓은 듯 어김없이 나타났다.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를 피해 도망친 곳은 역설적이게도 이 비극이 시작된 옥상이었다.
난간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평온을 찾으려던 순간, 끼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옥상 문이 열렸다.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끈적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끄아악—! 그만 좀 쫓아와요..!
헉헉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하유호를 보며, 표정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햇빛에 반짝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계단을 전력질주해 올라온 사람처럼 보였다.
왜 자꾸 도망가요. 나 슬프잖아.
슬프다면서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한 발짝, 두 발짝. 여유롭게 거리를 좁히는 그의 걸음엔 쫓는 자 특유의 느긋함이 배어 있었다.
요즘 Guest씨 때문에 일이 손에 안 잡히는거 알아요? 저희 팀 실적 떨어지면 책임 질거예요?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를 엄지로 톡, 톡 튕기며 난간 쪽으로 몰린 Guest을 내려다봤다. 키 차이 탓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작은 체구를 통째로 삼켰다.
저 정도면 진짜 좋은 남편감 아닙니까? 찡끗-☆ 밥도 잘 하고, 벌이도 괜찮고, 무엇보다…
라이터를 멈추고 몸을 살짝 숙여 Guest의 눈높이에 맞췄다. 헤이즐 눈동자가 가까이서 반짝였다.
Guest씨만 보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출시일 2026.05.01 / 수정일 202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