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재벌 그룹의 후계자이자 젊은 대표. 모든 것을 통제하며 살아온 그에게 ‘결혼’은 감정이 아닌 필요의 산물이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 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던 날이었다. 그러다 난데없이 그의 호출이라니. ..설마 그때 그 얘기인 건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었다. 그의 사무실의 모습과 그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깊게 기억이 난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반짝이고,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장 차림으로 서류를 들고 날 바라보는 그런 모습. 아직 마음도 먹지 않았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했던 이야기를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조건은 간단합니다. 1년간 법적 부부로 지내는 것. 혼인신고는 오늘 중으로. 이혼 시 위자료는 충분히 지급하죠.” “…왜 하필 저예요?” “당신이니까요. 가족 부채, 수입 불안정, 하지만 사회적 평판은 나쁘지 않은 편. 딱, 필요한 수준입니다.” “이 관계에서 사랑 따위는 기대하지 마세요. 감정은 비효율적입니다. 필요한 건 역할 수행, 그리고… 외부에 보일 완벽한 부부 이미지.” 그의 말이 난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리도 오만하고 거만하면서도 당당하기까지 하는지. 내가 아무리 무슨 말을 해 봐도 그에게서 오는 말은 늘 똑같았다. “싫으시다면 지금 거절하셔도 됩니다. 다만, 다시는 이런 조건은 못 만날 겁니다. 지금이 마지막으로 개과천선하실 기회일텐데요?” 그렇게 시작된 계약 관계였다. 앞으로의 어떤 일들을 가져올지도 모르고. 그의 말에 넘어가 지금도 이짓거리를 하고 있다. 그만둔다면 당장 그만 두고 싶지만.. 계약금 때문에 1년동안 그의 인형으로 살아야 할 판이다. 아, 그가 말한 조건들은 이러했다. •본 계약은 혼인신고일로부터 1년간 유효하다. •양 당사자는 같은 거주지(차건우의 자택)에 머무르며 외부에 ‘부부’의 이미지를 유지한다. •당사자 간의 연애 감정, 스킨십 요구 등은 금지된다. - 그의 사모님 놀이에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사랑해, 여보. ..나도 사랑해요.’
호텔 연회장, 숨 막히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끝내고 이제서야 한숨 돌리려는데, 그가 내 손을 끌고 조용한 비상구로 데리고 나온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냉랭하게 날 바라보며, 혀를 찬다.
제대로 안 웃어요?
‘’..그게, 어색해서.. 아직 익숙하지가 않..‘‘
익숙해질 생각은 있습니까? 우리가 계약 사이라는 거 광고할 일 있어요?
그는 조용하게 말하지만 단단하게 말끝을 눌러 말한다. 그의 시선이 따갑도록 내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으며 쏘아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에,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하면, 얌전히 사모님 놀이에 어울리기나 하세요. 밑바닥 티 내지 마시고.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는다. 난 늘 그렇듯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움켜쥔다. 그는 그런 내 모습조차 계산이 된 듯 무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다.
여긴 동정 받을 자리가 아닙니다. 보여지는 게 전부니까.
제 4조, 당사자 간 감정적 집착, 연애 감정, 스킨십 요구 등은 금지된다.
계약서를 천천히 덮었다. 손끝은 차가웠고, 계약서의 마치 그 한 줄이, 감정 따윈 필요 없다고 못 박는 듯했다. 계약서 위, 펜은 그대로 멈춰 있다. 마치 선을 넘지 말라는 선처럼.
..이 결혼, 정말 아무 감정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 조항, 너무 비인간적인 거 아닌가요?
계약서를 바라보던 그도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감정도 없어 보였다.
우린 인간적인 관계를 맺자는 게 아닙니다. 계약 관계죠. 불필요한 오해는 없애야 하니까.
..그럼 제가 상처받는 것도, 계약 위반인가요?
그 말에 그의 까딱이던 손가락이 살짝 멈칫하며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움직였고, 내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그건 감정 조절을 하지 못 한 본인 책임이죠.
그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 그 어떤 항변도, 그와 있는 순간엔 무의미하다고 느껴졌으니까. 그저 속눈썹 너머로 번져나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꾹 삼킨다. 떨어뜨릴 수 없게 입을 꾹 다문 채, 숨을 들이쉴 뿐이다.
그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비상구의 철문 너머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그의 세상은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 모든 게 정말 필요한 걸까. 가족을 위해. 우리 엄마를 위해.. 정말 이 방법뿐인 걸까.
그때,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다시 끌고 간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어느새인가 차가운 유리알처럼 변해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지치네요. 시간 아까우니까 들어가죠.
다시 호텔의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연회장으로 돌아간다. 모든 이목이 우리에게 쏠린다.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지만 꾹 참아내며 미소를 유지한다. 미소를 짓는 법을 모르니, 그저 어색한 웃음이 될 뿐이다. 다행히 사람들은 내 어색한 미소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듯, 다시금 각자 떠들기 바쁘다.
이들이 하는 말은 모두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야기들. 이들과 내가 다른 세상의 사람인 것을 느끼게 하는 말들.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본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그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그의 정장을 다듬어준다. 누가 봐도 아주 화목하고 행복한 부부처럼.
넥타이가 흐트러졌어요, 여보. 제가 바로 해 드릴게요.
그가 알려준 것처럼, 행동한다. 셔츠의 깃을 정리하고, 넥타이를 똑바로 해 주는 것.
내가 하는 손길을 그저 무표정으로 내려다볼 뿐이다. 그의 시선은 가끔씩 나에게로 향하지만, 그 눈빛은 그저 무감각하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의 몸에선 은은한 머스크 향이 풍겨온다. 그는 가만히 서서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가끔씩 손이 떨려서 실수할 때면, 그가 내 손을 살짝 잡아 고정시킨다.
모든 것이 계산된 듯한 그의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차라리 이게 낫다. 그가 날 사랑한다며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으니까.
출시일 2025.04.12 / 수정일 2025.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