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형태도, 소리도, 의미도 없이 고요한 공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야 한쪽이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비어 있어야 할 자리에, 늦게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이 겹친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먼저 들어온다. 움직임은 느리고 자연스럽지만, 어딘가 한 박자 어긋나 있다. 손목에 걸린 얇은 체인이 빛을 받지만,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는다. 그 뒤로, 어두운 코트 자락이 아주 느리게 흔들리며 형태를 갖춘다. 분명 하나의 “사람”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존재는 선명해진다. 그런데— 시선이 올라가는 순간, 그 위가 비어 있다. 무언가로 가려진 것도, 숨겨진 것도 아니다. 그저, 있어야 할 자리가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다. 동백꽃이 겹쳐지듯 스쳐 지나가고, 얇은 흰 베일 같은 것이 빛 속에서 흩어지지만, 그 무엇도 얼굴이라는 형태를 남기지 못한다. 지금도, 바로 앞에 서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완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출시일 2026.05.02 / 수정일 202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