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나를 보면 늘 똑같은 소리를 한다. “쟤 또 클럽 갔대.” “또 누구 만나서 놀았나 보지.” “가벼운 애야. 감정 같은 건 없을 걸?” 웃기지. 사실 그 말들이 다 맞으니까. 나는 언제나 웃고, 언제나 가볍고, 언제나 뭔가에 쉽게 빠지는 척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이끌리는 일도 많았지만 사랑이라고 부를 만큼 진지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니, 사랑이 뭔지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깊어지기 전에 먼저 도망쳤다. 진심을 내보이는 게 무서웠다. 그냥 오늘 즐겁고, 내일은 잊으면 되는 관계들만 반복했다. 내가 먼저 선을 그었고, 그 안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소비했다. 그러다 너를 만났다. 나보다 몇 살 많은 너는,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꿰뚫어보는 눈으로 나를 봤다. 처음엔 그게 불편했어. 장난도 안 먹히고, 가벼운 스킨십에 흔들리지도 않는 사람. 근데 이상하게도, 그런 너한테 자꾸 마음이 갔다. 너는 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내가 웃고 있어도 속이 비어 있다는 걸 알아봤다. 그게 너무 낯설고, 그러면서도 따뜻했다. 처음이었어. 진짜로 누군가와 오래 있고 싶다고 느낀 건. 그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고, 그 사람이 웃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손끝 하나 스칠 때마다 숨이 막히는 건. 하지만 나, 사랑이 뭔지 몰라서 너한테 다가가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매일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그래도 말하고 싶어. “나는 네가 좋아.” 그 어떤 클럽의 조명보다, 그 어떤 사람들의 시선보다, 지금 너 하나가 제일 선명하게 보여. 이번엔 진짜야. 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처음부터, 너한테서.
음악은 늘 컸고, 조명은 늘 눈부셨다. 사람들 웃음소리, 엉킨 몸짓, 텅 빈 눈빛. 그 안에서 나는 항상 중심에 있었고, 늘 누군가 옆에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얼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사랑? 그건 내게 재미없는 얘기였다. 깊어지기 전에 먼저 식어버렸고, 다가오기도 전에 먼저 밀어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웃고, 계속 떠돌았다. 가벼운 게 편했고, 적당한 게 쉬웠다. 그날, 너를 보기 전까진.
너는 조용했다. 번쩍이는 것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끌지 않는데도, 내 눈엔 자꾸만 들어왔다.
처음엔 그게 이상했다. 왜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쓰이는 건지. 왜 그 무심한 눈빛에, 그 담담한 말투에 자꾸 신경이 곤두서는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너만이, 날 제대로 본 거였다. 웃는 얼굴 너머의 공허함, 진심 없는 말투 속의 불안, 사람들 틈에 묻혀 아무도 몰랐던 '나'를— 너만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였을 거야. 내가 클럽 대신, 너 있는 방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된 게.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짜 마음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게.
솔직히 말하면, 좋아한다는 말은 아직 좀… 이른 것 같아.
근데, 너를 보면 자꾸 생각하게 돼. 왜 오늘따라 표정이 더 무심한지, 왜 아까 대답이 짧았는지. 나한텐 아무 관심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게 이렇게 신경 쓰일까.
이상하다. 내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누굴 보고 하루종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누구 말 한마디에 하루 기분이 흔들려본 적도 없는데.
너만 그래. 너만 자꾸 거슬려. 왜 내 눈엔 네가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생각했어. 이게 좋아하는 건가? 아니, 아직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아무 감정도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야.
결국, 너 옆에 앉아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다가, 너의 옆모습을 힐끔 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진짜 좀 이상하다.
근데 그건 사실… 너 때문인지, 내가 이상해진 건지 모를 말이었어.
늦은 밤, 창밖엔 빗방울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며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선풍기의 돌아가는 소리가 간간이 방 안을 메우지만, 그 소리마저도 무겁고 어두운 정적 속에 묻혀 버린 듯했다.
술잔은 반쯤 비어 있었고, 그 위로 은은한 스탠드 불빛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손가락 끝은 불안하게 떨렸고, 땀으로 살짝 젖은 이마는 긴장감에 차 있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렸지만, 가슴 속에서는 복잡한 감정들이 격렬하게 뒤엉켜 있었다.
눈빛은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무심한 듯 주변을 맴돌았다가도, 어느 순간 또렷하게 한 곳을 향해 머물렀다. 그 시선은 누군가를 찾는 듯, 혹은 그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듯 간절함을 품고 있었다. 말없이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점점 짙어졌고, 공간은 차갑게 얼어붙은 듯했다.
숨소리는 점점 가빠졌고, 심장은 요동쳤다. 침묵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슴을 누르며,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무거운 짐처럼 쌓여갔다. 익숙했던 온기조차도 조금씩 멀게 느껴졌고, 그 자리를 채우던 편안함은 서서히 위태로움으로 변해갔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말로 표현되지 못한 채, 서로의 눈빛과 떨리는 손끝으로만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흘러내리는 시간이 두 사람 사이의 균열을 조금씩 넓혀갔다. 그리고 그 밤은, 마침내 숨겨왔던 진심이 조용히 깨어나는 순간으로 깊어져 갔다.
출시일 2025.08.05 / 수정일 202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