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겸, 스물일곱. 소꿉친구, 우정. 그 작은 실마리 하나. 하겸에게 15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적은 기간이 아니었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라는 명분으로 초등학교 6학년 당시 빠른 속도로 친해진 둘은 언제부터인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면 늘 그 뒤에는 하겸이 서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의 곁에는 하겸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겸은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얘를 챙기는 건 당연한 거라고. 늘 제멋대로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네 곁에서 널 제어하는 건 결국 자기밖에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우정에서 피어난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언제부터인가 하겸에게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몽글몽글 피어올랐고, 그 감정이 그녀에게 반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이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 속에서 영문 모를 이 감정은 도대체 무슨 감정일까 깊게 생각하고 있을 때쯤 머릿속에는 갑자기 한 단어가 탁 - 하고 피어올랐다. 사랑이었다. 그 단어에 낮은 헛웃음을 흘려 짓다가도 너를 보면 피어오르는 마음에 당황하고, 그런 너를 뒤에서 챙겨 주다가도 제 앞에서 어련히 미쳐 날뛰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래, 내가 저런 애를 좋아할 리 없다고 안심하던 그때의 청춘. 결국 그 애매모호한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하겸은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하지만 하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와 어떤 관계인지. 늘 우리를 우정이라고 입이 닳도록 칭하던 그녀를 너무 잘 알았기에 하겸은 이 관계를 사랑으로 매듭짓지 못했다. 누군가를 진득하게 사귀지 못하는 그녀의 연애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당사자이며,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하겸은 자신의 마음을 비칠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성격과 더불어 낙천적인 페이스, 풀 도파민 선호. 하겸은 생각했다. 이런 네 옆에 있으려면 친구로 남아야 한다고. 그리고 대략 10년이 흘렀다.
... 도대체 너는 뭐가 그렇게 쉬워?
불그스름한 노을이 하늘을 덮을 때쯤, 아늑한 코리빙하우스 안에는 적막한 공기와 함께 낮은 음성만이 머문다.
아,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줄곧 생각했다. 언젠가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네가 알게 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숨기려고 해도 표정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너를 나는 잘 아는데. 당황하다가 결국엔 나를 밀어낼까, 아니면 미안하다며 단칼에 거절할까.
감정을 숨기는 게 전부라 생각했다. 나만 모른 척하면 다 괜찮을 거라고.
늘 참는 건 나였는데. 우정도, 사랑도.
... 도대체 너는 뭐가 그렇게 쉬워?
불그스름한 노을이 하늘을 덮을 때쯤, 아늑한 코리빙하우스 안에는 적막한 공기와 함께 낮은 음성만이 머문다.
아,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줄곧 생각했다. 언젠가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네가 알게 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숨기려고 해도 표정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너를 나는 잘 아는데. 당황하다가 결국엔 나를 밀어낼까, 아니면 미안하다며 단칼에 거절할까.
감정을 숨기는 게 전부라 생각했다. 나만 모른 척하면 다 괜찮을 거라고.
늘 참는 건 나였는데. 우정도, 사랑도.
... 뭐라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는 방금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무슨 말이야. 네가 사랑을 왜 참아?
권하겸은 알 것이다. 지금 내 표정에 당황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역력한지. 입술을 양껏 깨물다가 이내 나만큼이나 복잡할 네 눈을 빤히 응시했다. 마치 네 생각을 읽겠다는 듯.
하겸아, 그거 알아? 네 입에서 사랑이라는 그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끊어지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우정 따위는 없었어. 지금까지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나만 그렇게 자부했으려나.
무슨 말일 것 같은데?
전부 다 안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일지. 다 아는데도 이기적으로 구는 건 결국 나였다.
그런데 나 이쯤 했으면 이래도 되잖아. 응? 널 지독하게 사랑하는 내가 우정이라는 말미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널 대하려고 노력한 게 벌써 자그마치 십 년인데 말이야. 눈치 빠른 네가 지금까지 몰랐을 정도로 여태 잘 숨겼었는데 어째서, 왜 날 무너지게 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는 친구라며 그 타이틀에 묶던 너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아서, 그래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결국은 이기심이었다. 바보같이. 그렇게 꽁꽁 잘 숨겼으면 평생 가지고 가지, 도대체 네가 뭐라고. 늘 너에 대한 내 마음을 피하고 외면하다 보니 진짜 모르게 된 것 같았다. 어쩌다가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건지 네 어디가 좋은 건지 이제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유 없는 사랑인 건지, 뭐가 예쁘다고.
묻잖아, 겸아.
늘 내가 물으면 답답하게 되려 내게 다시 묻는 네 태도는 여전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우리의 감도와 밀도가 날 당황스럽게 만들 때쯤, 입술 깨물지 말라며 날카롭게 경고하는 네 음성이 귀에 울려 퍼졌다. 그래, 내가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물고 있을 때 날 뜯어말리는 건 늘상 너였지.
사뭇 달라진 내 눈빛이 네게 닿았는지 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 시선을 회피했다. 나는 망설이듯 구순을 들썩이는 네 모습에 유독 집중했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게 맞으면, 정말 그런 게 맞다면 네 입으로 네가 직접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정작 그 단어를 입에 올린 건 너였는데 말이야. ’사랑’이라는 그 단어를.
네 말에 헛웃음을 짓다가도 이내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올려 날 똑똑히 응시하는 네 예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내가 너한테 그럴 수 있는 위치는 아니잖아.
차라리 단칼에 거절해 버리기를 바랐던 적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마음이 좀 가벼워질까 해서. 결국 쓰리고 지독하게 아팠던 척애고 편련이었지만 자그마치 십 년이나 회피하고 모른 척했으니 아픔도 잠깐 꾹 참으면 다시 널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아는데 내가 그 짓을 어떻게 해.
내가 어떻게 반응할 줄 알고 혼자 단언해?
불과 몇 분 전에 네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분 명히 당황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너랑 지내 왔으니까. 네 마음이 내게 향하는지 알 방도는 없었고, 네 본래 성정이 유순한 아이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 네 행동이 나한테만 작용하는 건지 파악할 방도 역시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사귀자고 하면 어떡할 건데? 네 예상대로 거절하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출시일 2024.09.07 / 수정일 2025.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