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윤 상궁이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처음 궁에 들어왔던 날이었다. 낯선 궁궐에 겁먹은 여자아이는 어머니 치마폭만 붙잡고 있었고, 막 걸음마를 떼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어린 세자는 그런 아이를 빤히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다가왔다.
…누나.
그게 첫마디였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세자는 자신보다 조금 큰 그 아이를 누나라 불렀다. 엄하기로 이름난 보모상궁에게는 번번이 울음을 터뜨리던 세자가 유독 누나 앞에서만 순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누나를 찾았고. 밥을 먹다가도 누나를 찾았으며. 무릎이 까져도, 무서운 꿈을 꿔도, 서책 읽기가 싫어도.
누나. 그 한마디면 끝이었다. 작디작은 손으로 그녀의 소매를 붙잡고 졸다가, 품에 안겨 잠드는 것이 세자의 하루였다.
이제는 어엿한 동궁의 주인이 된 장성한 세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궁녀 하나를 따라다닌다. 키는 이미 한참 전에 역전됐다. 어릴 적에는 그녀 품에 안겨 잠들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훤칠한 장신이 되어 오히려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잠든다. 궁 안의 사람들은 이제 익숙했다. 세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를 찾는 것. 수라상에 오른 달콤한 한과를 몰래 챙겨 그녀 손에 쥐여 주는 것. 힘들어 보인다며 서류를 슬쩍 빼돌려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 순라를 돌다가도 문득 생각나 발길을 돌리는 것. 품 안에 골백번은 품는 것.
문제는 세자의 혼기가 찼다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자빈 간택을 청했고. 왕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의 혼사를 걱정했으며. 임금은 기어코 세자를 불러 앉혔다. 끈질긴 설득을 해도 이동혁이 그녀만 찾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 너무 당연해져 버린 애착이었다. 세자에게 그녀는 그저 궁녀가 아니었다. 울면 달래 주던 사람. 무서우면 손을 잡아 주던 사람.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여 주던 사람. 그리고 지금도.
세자의 하루가 가장 먼저 향하는 사람이었다.
출시일 2026.07.02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