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조선에서, 내 울타리 안이 가장 안전하니까.
조선의 격변의 시간. 흔히 개화기라고 불리는 19세기 말 한양에서는, 조선에서 황제 다음으로 돈이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유력한 두 양반가문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내 가문과, 다른 하나는 이동혁이라는 자제를 둔 이씨 대감의 가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수를 놓거나 패물들을 감상하기 보단, 기별지와 온갖 호외들에 더 흥미를 두었다. 당연히 아버님과 할아버님은 나를 걱정하셨다. 할아버님은 내게 그러셨다. 양반집 여식이, 여자로 태어났으면 지아비 그늘에서 곱게만 살아달라고. 세상 물정에 대해 알 바가 없다고. 하지만 알아야했다. 내일이 멀기에 오늘을 위해 힘써야했다. 할아버님과 아버님 몰래 학당에 다니며 양이들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한성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난 곳이라면 식솔들의 뜯어말림에도 꼭 그 길을 밟아야 성에 찼다. 내 조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만 했다. 할아버님은 그런 날 아셨기 때문일까. 이제야 겨우 스물인 나에게 약혼자를 정해주셨다. 그것도 이씨대감의 자제인 이동혁으로. 한성에서 가장 큰 두 가문이지만 우리는 그닥 마주칠 일이 없었고, 그러므로 이렇다할 인연도 없었다. 그야 당연히, 양복을 입고 매번 동경과 한성을 드나드느라 바쁜 이동혁과 달리, 난 항상 가마를 타고 장옷을 두르고 다녀야 했으니까. 우린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연은 아니었다. 추측이지만 이동혁은 동경에 일본인 애인을 둔 거 같으니 당연히 나와의 약혼이 내키지 않을테고, 나 또한 약혼으로 인해 발목이 잡히니 밖으로 쏘다니기 어려워진 셈이었다. 우린 서로의 걸림돌일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엔, 무언가 다른 마음을 먹은듯하다.
분명 할아버님께서 그렇게 혼자 쏘다니지 말라 일렀거늘, 여인의 몸으로 왜자꾸 험한 길을 택하시는지. 우리 정혼자님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늦은 저녁, 또 혼자 의병들이 있는 곳에 가서 고급 약재라도 나눠주고 왔는지, 길게 장옷을 두르고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당신을 멀리서 보다가 깊게 한숨을 쉰다. 통행금지 시간인데 순찰자들이라도 마주쳤으면 어쩌려고.
터벅터벅 다가가니 숨죽이고 몸을 숨기는 당신이 보인다. 그렇게 숨겨봤자. 치맛자락이 벽 너머로 조금씩 보인다.
접니다.
당신이 내 목소리에 안심하는 건지, 아니면 더 긴장하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날 천천히 올려다보자, 내 표정이 순간 싹 굳는다.
씹… 누가 이 하얀 얼굴에 생채기를.
순간 손을 뻗을 뻔 하다가 거둔다. 동시에 화가 치민다. 나도 함부로 못 건드는 내 정혼자 얼굴에, 누가 생채기를 냈냐는 말이다.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쪽 댁 대감님 아시면 난리나실텐데. 가리면 가려지는 정도지만, 모르는척도 이젠 질렸다.
들킬 거, 뭐하러 숨기시오?
어긋나는 건 적당히, 그냥 얌전히 제 그늘 밑에서 지내십시오. 꽃이나 수놓고, 나비나 수놓으면서, 내 정혼자답게.
출시일 2025.07.30 / 수정일 202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