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집은 늘 조용했다. 조용한데, 편안해서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단정해서였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자리에서 밥을 먹고, 정해진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집.
웃음소리도 크면 안 됐고, 질문도 길면 안 됐다. 잘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못하는 건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게 내가 자라온 방식이었다.
1남 2녀 중 둘째. 위에는 완벽한 오빠, 아래에는 기대를 받는 막내. 그 사이에서 나는 늘 ‘적당히 잘하는 애’로 남아야 했다. 튀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게 가장 편한 자리였으니까.
근데 그 편함이, 어느 순간부터 숨이 막혔다.
고3이 되면서 집 안 공기가 더 조여왔다. 수능 얘기, 대학 얘기, 미래 얘기. 다 맞는 말인데, 다 남이 정해준 길 같았다. 그래서 그냥, 버텼다. 다른 선택지를 찾기보단, 일단 가장 확실한 방법부터.
결과로 증명하는 거.
수능 날, 이상하게도 떨리진 않았다. 오히려 끝나고 나서야 손이 떨렸다. 그리고 몇 주 뒤, 합격 발표가 뜨던 날.
나는 당당히 명문대에 합격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숨이 좀 트였다.
그래서 바로 말했다.
“나 독립할게.”
식탁 위 공기가 잠깐 멈췄다. 부모님의 표정이 굳었고, 오빠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막내는 조용히 밥만 입에 넣었다.
“그럼 지원 다 끊는다.”
예상했던 말이었다.
“알아서 살아.”
겁 주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한마디로 끝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다시 붙잡힐 것 같아서.
결국 부모님이 먼저 손을 들었다. 완전히 끊진 못했다. 대신 거리는 생겼다. 자주 보진 않지만, 생일이나 명절엔 만나고. 서로 선은 지키는 관계.
그 정도면 충분했다.
혼자 사는 집은 조용했다. 근데 그 조용함은 다르게 느껴졌다. 숨 막히는 게 아니라, 그냥 비어있는 느낌. 처음엔 그게 낯설었는데, 금방 익숙해졌다.
대학교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할 건 많았고, 해야 할 것도 명확했다. 괜히 흔들릴 시간도 없었다. 졸업할 때쯤엔 이미 방향이 잡혀 있었고, 면접도 여러 번 봤다.
그리고 결국, 패션 계열 대기업.
합격.
지금은 그 회사에서 대리로 일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잘 풀린 인생일 수도 있다. 명문대 졸업하고, 좋은 회사 들어가고, 스스로 돈 벌고 사는 거.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나는 안다.
이게 그냥 얻어진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지금의 생활이 더 마음에 든다.
내 시간 써서 일하고,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거.
퇴근하고 백화점 들러서 천천히 매장 구경하는 거, 특히 향수 코너.
굳이 사지 않아도 괜히 몇 개 꺼내서 맡아보고, 손목에 뿌려보고, 그 향이 하루 끝에 남아있는 거.
그게 생각보다 좋다.
그래서 최소 한 달에 한 번쯤은 꼭 간다.
작은 보상처럼.
누가 정해준 게 아니라, 내가 고른 방식으로 사는 거.
그게, 내가 지금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그 날도 평소처럼 퇴근하고 백화점에 들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향수 매장 쪽으로 발이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특유의 공기가 있다.
섞여 있는데, 이상하게 정돈된 향. 그게 좋아서 오는 거니까.
몇 번 둘러보다가, 익숙한 향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손이 먼저 가려다가, 멈췄다.
옆에서 같은 걸 잡으려던 손이 겹쳤다.
…아.
고개를 살짝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두 번째 봤던 애.
그 애가 먼저 손을 빼면서 말했었다.
“먼저 하세요.”
나는 그냥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했고, 그게 전부였는데.
이번엔,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또 보네요.
그 애가 잠깐 멈칫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시향지를 내려놓고 한 발 옆으로 비켰다.
다른 거 맡아볼래요?
굳이 이유는 없었고, 그냥. 세 번째면, 그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서.
잠깐 망설이던 얼굴이었는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자연스럽게 시향지를 건넸고, 내가 먼저 뿌려봤다.
새로운 향이 퍼졌다.
이거, 여름엔 조금 무거울 수도 있는데.
그 애 쪽을 보며 말했다.
그 애는 시향지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맡더니,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짧게.
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단단했다.
나는 괜히 한 번 더 웃었다.
금요일, 딱 6시 맞춰서 퇴근했다.
약속은 6시 반. 시간 맞춰 도착하려고 차를 몰았다.
퇴근 시간대라 도로는 조금 막혔는데, 이상하게 급하진 않았다.
이제는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서 그런가.
와인바 근처에 도착해서 천천히 차를 세웠다.
오늘 향수, 조금 더 가볍게 뿌릴 걸 그랬나.
괜히 그런 생각이 들다가, 피식 웃고 문을 열었다.
내리자마자 바로 보였다.
입구 바로 앞, 벽 쪽에 쭈그려 앉아 있는 애.
고개 숙이고 핸드폰 보고 있다가, 내가 가까워지니까 슬쩍 고개 들었다.
눈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딱, 아는 얼굴 봤을 때 나오는 그 느낌.
나는 몇 걸음 더 다가가서, 그 앞에 섰다.
거기 왜 그렇게 앉아 있어요.
처음엔 향으로만 기억하던 애였는데 백화점에서 몇 번 마주치고, 같은 향 고르다가 말 트고, 연락처 주고받고.
와인 클래스도 같이 듣고, 어느 날은 밤에 그냥 드라이브 한 번 같이 나갔다가 그게 몇 번 더 이어지고. 차 안에서만 말이 길어지는 애.
낮에는 조심스럽다가, 밤 되면 조금 솔직해지는 애.
그 애가 물었다.
나는 손목 시계를 한 번 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아니요. 시간 맞춰 온 건데.
나는 고개 살짝 기울이면서 덧붙였다.
그쪽이 일찍 온 거죠.
쭈그려 앉아 있던 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한 번 웃었다. 네. 가죠.
출시일 2026.05.14 / 수정일 202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