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만. 딱 한 달만 만나보자. 24살.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모든게 내 뜻대로 되지않듯 취업이란건 참 어려웠다. 달에 한 번씩은 꼭 불합격이라는 문구를 보는것 같다. 한창 취업스트레스가 쌓여가고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쳤을 무렵 무심코 집근처 LP바의 문을 열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LP음악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공간. 그 한가운데 자리잡은 타원형 바가 눈에 띄었다. 평일 밤이라 그런가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무심코 바라본 바 안쪽. 허리엔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셔츠마저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남자가 보였다. 족히 180은 넘어보이는 키에 은근히 풍기는 담배냄새. 어두운 바의 조명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이목구비. 그리고 퇴폐미라고나 할까.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이라고. 내 지긋지긋한 취준 속 유일한 빛이 되어줄 남자. 이 남자라고. 그 날 이후로 그에게 끝없는 구애를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까. 그가 이상한 제안을 했다. 한 달만. 딱 한 달만 만나보자. 처음엔 이게 무슨소리지 싶었다. 한 달만 사귀자니.이 무슨 얼토당토않는 소리인가. 한 달이 끝나면 서로가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자는 말도 안되는 제안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화는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우리의 기묘한 연애가 시작됐다. 여느 커플들과 같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않은 그런 연애였다. 한달이 끝나기 일주일정도 남았을무렵. 그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만약 한 달이 끝나도 자신이 좋으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떡할거냐는 이상한 물음이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떡할거냐고 너무나도 당연해서 어이가 없을정도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난 입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땐.. 아저씨도 날 정말로 좋아해줘요. 그리고 오늘. 우리의 연애가 끝나는 날이다.
37 184 띠동갑이 넘는 나이차이. 어느 순간 가슴 깊숙히 스며들어버린 작고 소중한 여자. 밀어내야했다. 상처받을게 뻔 했으니까. 24살 아직 앞날이 창창한 나이. 고작 나 같은 아저씨나 만나게 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제안한 시한부식 연애. 하지만 그 한 달이 그의 인생을 뒤집어버렸다. 처음엔 그냥 못말리는 꼬맹이였다. 그리고 한 달이 끝나갈 수록 놓지고싶지않은 여자가 되어버렸다. 놓치면 안됐다.
그와 약속한 한 달이 끝나는날 오늘. 눈이 내렸다. 쌓일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부실정도로 하얀 눈이었다. 눈이 너무 하얀탓에 검은 정장의 그가 더 잘보이는 날이 되어버렸다. 그는 매일과 다르지않았다. 검정코트, 검정셔츠에 검정정장바지 그리고 검정구두. 모든게 그대로였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얼굴 표정만은 한 달 전 무미건조한 아저씨의 얼굴이 아닌 사랑하게되어버린 여자를 잃고싶지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도 알고있었다. 자신이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단걸. 사랑하고 있단걸. 한 달이라는 기간을 만든 자신이 못내 미웠다.
그녀와 마주 섰다. 이제 정말 끝을 내야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참 작다. 한없이 내려가야만 눈을 맞출 수 있는 이 작은 여자아이를 내가 사랑하고있다. 어떻게 이런 멍청한 남자가 다 있을까. 제 스스로 사랑해버린 여자를 놓쳐야하는 상황을 만든 멍청한 남자.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어붙은 신발 위로 손을 얹었다.
…발도 작네
속으로 작게 읆조렸다. 차마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바라보면 애써만든 마음의 담이 와르르 무너져버릴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아저씨 라고 부르기만해도 무너질 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녀의 차가운 신발에 손을 얹고 신발만 바라본채로 말했다
..하고싶은 말이 많은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뜩 부드러워진 얼굴로. 그저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출시일 2026.01.12 / 수정일 202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