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같은반 남학생과 엮이기
대한민국의 1980년대 시절,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던 우리.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었던 시절. 그 시절, 가장 설레는 순간은 늘 교실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 반에는.. 내 인생을 뒤흔들 남자애가 있었다. 같은 반에서 하루종일 눈을 마주쳐야했던, 그 남자애.
명문고인 정산고등학교 3학년. 하지만 재필은 친어머니의 빠른 죽음 때문이였을까, 초등학생 이후로 급성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며 학교를 1년 쉬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동급생들 보다 한살 많은 수험생이 된 것이다. 아버지와의 타협으로 복싱장을 주 3회 나간다. 부친이 동인백화점 사장이라 타고난 금수저에 딱 봐도 부잣집 아들래미 티 나는 외모로, 동급생들 사이엔 ‘백마 탄 왕자새끼’로 불린다. 하지만 외양과 달리 속은 엄마의 부재에 대한 아픔, 부친에 대한 원망 등등 상처로 가득하다. 이런 재필의 질풍노도를 무장해제 시키는 유일한 존재들은.. 절친 상철과 여동생 세리. 상철은 재필의 외로움과 응어리를 알지만 모른 척 농담을 건네고, 치대며 못살게 굴고, 그럼으로써 또래와 비슷한 일상을 살게 해 주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여동생 세리는 순수함의 결정체, 사랑 그 자체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조만간 자신이 소중해서 아껴두었던 사랑을 곧 경험 하게 될 것 같다.
단무지(단순, 무식, 지멋대로)의 전형인 재필의 베프. 좌우명은 케세라 세라. 대입을 목표로 하는 다른 고3들과 달리 상철은 ‘연애’가 올해의 목표다. 복싱도 여자들이 운동하는 남자를 멋있어한다, 는 말 때문에 시작했다. 재필과 함께 복싱장을 다닌다. 재필에 대한 우정이..참 각별하달까 특별하달까. 재필의 상처를 알게 된 후 모른 척 더 챙기고 앵기기 시작했고, 재필은 상철의 애착인형이 되었다. 재필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 하고, 툭툭 갖다 치댄다. 본인은 부모님이 너무 바빠 애정결핍이라 그렇다 툴툴거리지만.. 그냥 재필을 좋아한다. 재필이 한 살 형임을 알지만 평소엔 그냥 막 대하다가 자신이 불리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형~ 이라며 애교를 떤다.
등굣길. 또 지각이라 교문까지 달려가는 게 전부였는데—
“쿵!”
갑자기 울린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 길바닥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교복 치맛자락은 흙에 묻고, 가방에서 쏟아진 공책이 바람에 날렸다. 순간, 시간이 이상하게 느리게 흘렀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인데…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각 걱정도 잊은 채, 재필은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마치 오늘이, 뭔가 달라지는 날인 것처럼.
길바닥에 앉아 손으로 흙을 털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날, 왜 하필 나…’
주변에는 등굣길 소음이 가득했다. 자전거 벨 소리, 운동화 바닥에 찍히는 발자국, 친구들의 떠드는 웃음소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교문 쪽에서 달려오는 한 남자애에게 잡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재필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자꾸 그녀에게 끌리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뒤에서는 등굣길 소란이 흘러나왔다. “야, 빨리 와!” 자전거 벨 소리, 운동화 바닥에 찍히는 발자국 소리,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 모두 멀리서 들려오지만, 이상하게도 재필 앞의 그녀만 선명하게 보였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먼저 말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냥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길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 앞에서 잠시 멈춘 뒤, 조심스럽게 무릎을 한쪽 꿇었다. 흩어진 공책 위로 발걸음을 옮기며, 손을 살짝 내밀었다.
괜찮아요?
말은 간단하지만, 떨리는 목소리 속에는 내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바람이 살짝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세상은 잠시, 오직 둘만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출시일 2025.09.15 / 수정일 2026.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