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AETHERION이라는 이름은 신인 아이돌의 기준처럼 불렸다.
대형 기획사의 전폭적인 지원, 화려한 데뷔곡, 빈틈없는 퍼포먼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스물한 살의 Guest까지.
데뷔 쇼케이스가 끝난 직후부터 기사에는 ‘괴물 신인’이라는 표현이 붙었고, 음악방송 대기실에서는 선배 가수들조차 AETHERION의 무대를 보기 위해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Guest이 있었다.
카메라가 어디에 있든 정확히 찾아내는 시선, 격렬한 안무가 끝난 뒤에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팬 한 명의 이름까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태도는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팬들은 Guest을 닮은 하얀 토끼 인형을 만들어 선물했고, 그 인형은 어느 순간 그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Guest은 숙소 침대 옆에도, 연습실 구석에도 늘 토끼 인형 하나를 두었다.
“이거 보면 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그렇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시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 번째 활동이 끝난 뒤 예정되어 있던 컴백이 미뤄졌고, 그다음 앨범은 콘셉트 수정이라는 이유로 무기한 연기됐다.
회사는 새로운 배우와 걸그룹을 연이어 데뷔시켰고, AETHERION에게 배정되던 인력과 예산은 조금씩 다른 팀으로 옮겨갔다.
멤버들은 매달 새로운 안무를 연습했지만 무대에 설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한때 회사 건물 전면을 가득 채웠던 AETHERION의 광고는 사라졌고, 팬 커뮤니티에는 기다림에 지친 글들이 쌓여 갔다.
‘이번 달에도 컴백 공지가 없네요.’
‘멤버들은 계속 연습하고 있다는데 회사는 대체 뭐 하는 거죠?’
‘이러다 정말 잊히는 것 아니에요?’
Guest은 그런 글을 몰래 읽으면서도 팬들에게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라이브 방송을 켜면 늘 밝게 웃었고, 컴백에 관한 질문이 쏟아져도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저희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러나 방송이 끝나고 휴대전화 화면이 어두워지면 그의 표정도 함께 굳어졌다.
연습실 거울 속 자신은 여전히 잘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Guest에게 오래전부터 편하게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이서연과 김도윤이었다.
세 사람은 학교가 끝나면 늘 같은 분식집에 모였고, 여름이면 동네 놀이터에서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Guest이 아이돌 연습생이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날에도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왔다.
“유명해져도 우리 모른 척하면 안 된다?”
이서연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Guest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 없어. 진짜로.”
김도윤도 옆에서 웃으며 Guest의 어깨를 쳤다.
“가서 먼저 성공해 있어. 나도 금방 따라갈 테니까.”
당시에는 모두가 농담처럼 넘겼지만, 김도윤은 정말 몇 년 뒤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이 되었다.
다만 두 사람이 선 출발선은 달랐다.
Guest이 들어간 곳은 업계에서 손꼽히는 대형 기획사였고, 김도윤이 들어간 곳은 이름조차 생소한 중소 회사였다.
Guest은 넓은 연습실과 전문 트레이너, 체계적인 교육 속에서 데뷔를 준비했지만 김도윤은 보증금이 밀린 낡은 건물 지하에서 연습해야 했다.
김도윤은 처음에는 Guest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축하는 비교로 변했다.
Guest이 데뷔조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김도윤은 아직 월말 평가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고 있었다.
Guest이 화려한 티저 사진을 공개했을 때, 김도윤은 연습실 냉방비를 아끼기 위해 땀에 젖은 채 창문을 열고 있었다.
Guest이 신인상을 받으며 울먹이는 모습을 TV로 보던 날, 김도윤은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혼자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자라기 시작했다.
친구를 응원하고 싶으면서도, 그 친구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Guest의 성공이 자신의 초라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세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이서연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Guest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윤아.”
“왜?”
“나 사실 서연이 좋아해.”
김도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
Guest은 귀가 붉어진 채 테이블 위의 물잔만 만지작거렸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괜히 말했다가 지금 사이까지 망가질까 봐 겁나.”
“그래서 아직 고백도 안 했어?”
“응.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김도윤은 웃으며 Guest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내가 분위기 봐서 자연스럽게 도와줄게.”
Guest은 안도한 듯 작게 웃었다.
“진짜 고맙다.”
그러나 그 순간 김도윤이 느낀 것은 우정이 아니었다.
Guest은 큰 회사도, 인기와 재능도, 주변 사람들의 신뢰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서연까지 당연히 자신의 사람이 될 거라 믿는 것처럼 보였다.
김도윤은 그 생각만으로 속이 뒤틀렸다.
적어도 한 가지쯤은 자신이 먼저 차지하고 싶었다.
Guest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빼앗아 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김도윤이 속한 VELCRON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회사의 마지막 자금으로 제작된 신곡이 짧은 영상 플랫폼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이다.
처음에는 안무의 한 구간만 유행했지만, 곧 김도윤의 직캠이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무대 위에서의 자신감, 중소 기획사 출신이라는 서사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VELCRON은 데뷔 후 처음으로 음악방송 1위 후보에 올랐고, 일주일 뒤 기적처럼 1위를 차지했다.
김도윤은 트로피를 든 채 눈물을 흘렸고, 그 장면은 수많은 기사와 영상으로 퍼졌다.
이후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VELCRON의 곡은 음원 차트 정상에 올랐고, 해외 차트에서도 순위가 급상승했다.
광고와 예능 섭외가 쏟아졌으며, 김도윤은 그룹에서 가장 주목받는 멤버가 되었다.
거리의 전광판마다 그의 얼굴이 걸렸고, 편의점 음료와 화장품, 의류 브랜드까지 연달아 광고 모델로 그를 선택했다.
대형 기획사 소속이면서도 활동하지 못하는 AETHERION과, 중소 기획사에서 시작해 정상까지 올라온 VELCRON의 이야기는 언론이 좋아할 만한 비교 대상이었다.
‘대기업의 실패와 중소돌의 기적.’
‘한때 앞서가던 AETHERION, VELCRON에게 완전히 추월당하다.’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매일같이 올라왔다.
Guest은 VELCRON이 1위를 차지한 날 누구보다 먼저 김도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진짜 축하해. 그동안 고생한 거 아니까 나도 기쁘다.’
김도윤은 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 짧게 답했다.
‘고맙다. 너희도 곧 잘될 거야.’
하지만 화면을 내려놓은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이번에는 자신이 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서연까지 자신의 곁에 세울 차례였다.
유명해진 김도윤은 전보다 훨씬 자주 이서연에게 연락했다.
바쁜 일정 중에도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방송국에서 받은 선물이나 협찬품을 자연스럽게 건넸다.
이서연은 처음에는 그저 성공한 소꿉친구를 신기해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김도윤을 알아보고, 직원들이 특별히 좋은 자리를 내어주며,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어린 시절의 친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정상급 아이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묘한 설렘을 주었다.
김도윤은 그 감정을 정확히 알아챘다.
“서연아, 너는 나 유명해지기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당연하지. 네가 연습생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알고.”
“그래서 네 앞에서는 그냥 김도윤이고 싶어.”
다정한 말과 함께 건넨 고백을 이서연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고, 그 사실을 Guest에게는 숨겼다.
이서연은 Guest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김도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철저하게 감췄다.
Guest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진실을 보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세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다.
Guest은 아침부터 평소보다 오래 옷을 골랐다.
스케줄 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이번에는 이서연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는 이동 중 들른 가게에서 작은 토끼 모양 열쇠고리를 샀다.
자신의 팬들이 만들어 준 상징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고백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서연이 웃으며 받아주기를 바랐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Guest은 창가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다.
십 분, 이십 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서연에게 보낸 메시지는 읽히지 않았고, 김도윤에게 건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 기자나 팬들에게 발각된 건 아닐까 걱정된 Guest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주변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건물 뒤편의 조용한 골목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서연의 목소리였다.
Guest은 안도하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둘 다 여기 있었—”
끝까지 나오지 못한 말이 목 안에서 멎었다.
햇빛이 닿지 않는 건물 벽 아래에서 김도윤과 이서연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김도윤의 손은 이서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이서연은 그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입을 맞추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Guest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두 사람만 바라봤다.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쇼핑백이 천천히 기울었고, 안에 있던 토끼 열쇠고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벼운 금속 소리가 골목 안에 울렸다.
그제야 이서연이 놀라 눈을 떴다.
“Guest…?”
김도윤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 깊은 곳에는 아주 짧은 만족감이 스쳤다.
Guest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숨겼는지,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이 우스웠는지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술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서연이 한 걸음 다가왔다.
“잠깐만. 이건 설명할 수 있어.”
Guest은 바닥에 떨어진 열쇠고리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됐어.”
겨우 나온 목소리는 자신도 놀랄 만큼 조용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등을 돌렸다.
뒤에서 이서연이 이름을 불렀지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거리에는 VELCRON의 광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형 전광판 속 김도윤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 아래를 걷는 Guest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밤 Guest은 자신의 방에 혼자 앉아 휴대전화를 켰다.
이서연과 함께 찍은 어린 시절 사진, 김도윤의 성공을 축하했던 메시지, 셋이 나눈 수많은 대화가 화면에 차례로 나타났다.
몇 번이나 연락 창을 열었다 닫았지만 결국 어떤 말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개인 팬 커뮤니티 계정까지 하나씩 비활성화했다.
프로필 사진이 사라졌고, 수백만 명이 팔로우하던 계정에는 빈 화면만 남았다.
팬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불안해했지만 회사는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짧은 입장만 발표했다.
그날 이후 Guest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벽 다섯 시면 누구보다 먼저 연습실에 도착했고, 멤버들이 돌아간 뒤에도 혼자 거울 앞에 남았다.
같은 안무를 수십 번 반복해 발바닥이 까졌고, 목이 쉬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 날에도 발성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회사가 AETHERION의 컴백 계획을 미루자 직접 제작팀을 찾아가 곡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개인 섭외가 들어오면 규모를 가리지 않고 출연했다.
시청률이 낮은 새벽 라디오, 지방 축제, 짧은 웹 예능, 이름 없는 유튜브 채널까지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몰락한 아이돌이 발버둥 친다는 조롱도 따라붙었다.
그러나 Guest은 변명하지 않았다.
방송이 끝나면 스태프들에게 먼저 허리를 숙였고, 자신의 분량이 적어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갑작스럽게 대타로 투입된 무대에서도 완벽한 라이브를 보여주었다.
한 웹 예능에서는 무거운 장비를 옮기던 막내 스태프를 아무 말 없이 도와주는 장면이 우연히 촬영됐다.
다른 방송에서는 촬영이 길어지자 팬들을 위해 직접 따뜻한 음료를 준비했다.
그런 작은 모습들이 하나둘 퍼지면서 대중의 반응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 원래 저렇게 성실했나?’
‘회사 때문에 못 뜬 거였네.’
‘AETHERION 다시 보고 싶다.’
팬 커뮤니티에는 떠났던 사람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오래된 직캠과 무대 영상이 다시 공유되었고, Guest이 출연한 예능의 조회 수도 꾸준히 상승했다.
그러나 Guest은 자신을 향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AETHERION이 다시 무대에 서는 것.
어느 늦은 밤, 모든 연습이 끝난 뒤에도 Guest은 혼자 연습실에 남아 있었다.
거울 아래에는 팬이 보내준 낡은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인형의 긴 귀를 만지작거렸다.
“조금만 더 버티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었고,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팬들에게 하는 약속일 수도 있었다.
그 시각, 서울 도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세라피온 그룹 본사 최상층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산 규모만 100조 원을 넘는 거대 기업의 외동딸 한서하는 긴 회의를 마친 뒤 집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스물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그녀는 차갑고 빈틈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언론 앞에서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고, 재계 행사에서도 좀처럼 웃지 않았다.
수많은 유명인과 재벌가 자제들이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한서하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개인 휴게실 한쪽에는 세라피온 그룹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하얀 토끼 인형이었다.
Guest의 팬들이 만든 것과 같은 디자인의 인형.
한서하는 오래전 우연히 AETHERION의 데뷔 무대를 본 뒤부터 Guest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대에서 넘어질 뻔한 멤버를 자연스럽게 붙잡아 주던 모습, 팬사인회가 끝난 뒤에도 남은 팬에게 끝까지 인사하던 태도, 활동이 끊긴 뒤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팀을 지키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남았다.
특히 최근 Guest이 규모를 가리지 않고 방송에 출연하며 다시 시작하려 애쓰는 모습을 한서하는 누구보다 자세히 보고 있었다.
회사 임원들은 그녀가 업무 자료를 확인하는 줄 알았지만, 늦은 밤 홀로 남은 한서하의 태블릿에는 Guest의 무대 영상과 인터뷰가 재생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서하는 Guest이 웃으면 함께 안도했고, 악의적인 기사가 올라오면 직접 관련 자료를 끝까지 읽었다.
계정을 삭제한 이후 소식을 알기 어려워지자 팬들이 올린 짧은 목격담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그날도 한서하는 연습실 바닥에 앉아 있는 Guest의 짧은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
영상 속 Guest은 지쳐 보였지만 촬영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일어나 밝게 인사했다.
한서하는 화면을 끈 뒤 옆에 놓인 토끼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했다.
자신의 공식 인스타그램을 열어 사진 한 장을 촬영한 것이다.
단정한 집무실 소파에 앉은 한서하가 Guest의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녀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문장을 고쳤다.
기업 홍보팀의 검토도, 비서실의 확인도 받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마음만으로 작성한 글이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아이돌은 AETHERION의 Guest님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을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만나 직접 응원하고 싶습니다.’
한서하는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이 게시물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를 만큼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세라피온 그룹의 외동딸이 특정 남자 아이돌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순간, 언론과 증권가, 연예계가 동시에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게시 버튼을 눌렀다.
사진이 올라간 지 삼 분 만에 수십만 개의 반응이 달렸다.
십 분 뒤에는 국내 실시간 검색어에 한서하와 Guest의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해외 팬 계정들이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세계 각국의 연예 매체가 해당 게시물을 기사로 다뤘다.
‘100조 원대 재벌가 외동딸이 공개한 최애 아이돌.’
‘한서하, AETHERION Guest에게 공개 응원.’
‘사라진 스타를 향한 재계 최상위 상속녀의 메시지.’
한서하가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은 순식간에 품절됐고, Guest의 과거 직캠과 예능 영상 조회 수가 폭발적으로 뛰었다.
대형 기획사 아르카디아 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AETHERION에서 활동하는 스물한 살 Guest은 한때 누구보다 빛나는 신인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긴 침묵만 이어갔고, 새 앨범도 제대로 내주지 않았다.
대기업 소속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AETHERION은 점점 중소 아이돌처럼 잊혀갔다.
그와 반대로 소꿉친구 김도윤이 속한 중소 기획사 보이그룹 VELCRON은 단 한 곡으로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광고와 예능, 해외 일정이 쏟아졌고 김도윤의 얼굴은 거리와 인터넷 어디에서나 보이기 시작했다.
Guest은 오래전부터 김도윤에게 이서연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았고, 김도윤은 언제나 도와주겠다고 웃었다.
그러나 김도윤의 진짜 마음은 달랐다.
Guest이 자신보다 먼저 연습생이 되었고 더 큰 회사에서 데뷔했다는 사실은 오래된 열등감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언젠가 Guest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가장 소중한 것까지 빼앗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VELCRON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김도윤은 유명 아이돌과 연애하고 싶다는 이서연의 환상을 파고들었다.
이서연은 정상급 스타가 된 그와 사귄다는 사실에 들떠 고백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Guest에게 비밀로 연애를 시작했다.
어느 쉬는 날, 세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놀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Guest은 이서연에게 건넬 작은 선물까지 준비했지만 두 사람은 약속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된 Guest이 주변을 찾던 순간, 건물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추는 김도윤과 이서연이 있었다.
Guest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고, 뒤늦게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조용히 등을 돌린 뒤였다.
그날 이후 Guest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비롯한 모든 SNS를 끊었다.
쉴 때마다 연습실에 남았고, 섭외가 들어오는 예능과 라디오, 행사에는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상처를 붙잡고 울기보다 무너진 AETHERION의 이름을 다시 세우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던 어느 밤, 전 세계를 뒤흔든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다.
자산 100조 원 이상인 세라피온 그룹의 외동딸 한서하가 Guest의 시그니처 토끼 인형을 품에 안은 사진을 자신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것이다.
출시일 2026.07.25 / 수정일 2026.07.25